스무 살 때, 난 대입 준비를 하며 한 회사에 입사했다. 말단 사원들부터 주임, 대리, 팀장, 과장, 차장, 부장에 본부장까지 위계질서가 꽤 두터운 대기업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난 이제 막 학생티를 벗은 최고 막내였다. 모든 게 처음이라 모든 게 쉽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것도 사수에게 물어보고 확인하며 진행했고, 조금 중요한 일이라도 맡으면 돌다리를 건너듯 요리조리 살피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움직였다. 그런 서툰 모습들이 예뻐 보였는지 나이 많은 과장, 차장, 부장님들은 날 잘 챙겨주셨다.
하지만 첫 사회생활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윗 상사인 바로 나의 사수였다. 나보다 딱 한 살 위, 나의 사수는 참 헷갈리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세상 친절하게 나를 안내했고, 기분이 안 좋으면 바로 옆에 있는 나를 철저히 무시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수의 기분이 언제 좋고, 언제 나빠지는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2000년대 초반이었던 그 시절 직장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문화 중 하나는 바로 ‘회식’이였다. 회식 통보는 언제나 상사분들의 기분에 따라 급작스럽게 전달되었고, 회식 약속은 그 누구의 스케줄보다 우선시되었다. 회식 참여나 불참 여부 조사는 언제나 막내의 몫이었고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어떤 상사가 나를 불러 회식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려주면 나는 부서별 직원 이름이 담긴 엑셀 파일을 열고 [o/x] 칸과 사인칸, 비고란을 만들어 출력을 한 다음 딱딱한 결재판에 넣어 직원들 자리마다 돌아다녔다. 한 명, 한 명 자리를 돌며 볼펜이 꽂혀있는 결재판을 내밀었다.
직원들은 회식 참여 여부인 o나 x를 표시하고 사인을 한 뒤 나에게 결재판을 기계적으로 돌려주었다. 회식 불참 의사로 x에 표시한 직원에게는 비고란에 그 이유를 적어달라고도 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참 불편했다. 내가 회식 공지를 내리는 당사자도 아닌데 직원들은 내 앞에서 불평을 했기 때문이다.
x 표시 옆 비고란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채워졌다.
- 가족 경조사
- 건강검진 예약
- 중요한 선약
- 직계가족 입원
- 거래처 업무 미팅
- 야근
이 정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분들은 사인받으러 온 막내가 회식공지를 내린 당사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듯 내 앞에서 궁시렁대곤했다. 난 그때마다 “그러게요…”라고 말하며 결재판을 빼앗듯이 당겨 얼른 옆자리로 옮겨갔다. 대부분은 아무 죄없는 내 앞에서 뭐라했지만, 그중에서도 안절부절하며 결재판을 내미는 나에게 “지현씨가 수고가 많아요.”라고 인사를 건네며 X표시를 해주기도 했다. 그런 분들은 꽤 인상적인 내용으로 비고란을 채웠는데 아직도 생각하는 몇 가지 내용들이 있다.
- 와이프 생일선물 준비
- 출산 막달로 항시 퇴근 준비 중
- 결혼할 사람과 결혼 전 막판 데이트
서툰 업무만큼이나 회식 문화 적응에도 난 어려움을 겪었다. 회식자리에서의 상석은 어디인지, 건배사는 진지하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막내 특유의 유머를 넣어도 되는 건지, 막내인 나는 몇 차까지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지, 노래방에서 탬버린은 내가 쳐야 하는 건지 누군가에게 챙겨 줘야하는 건지, 집에 갈 때는 어느 선까지 인사를 드리고 가야하는지... 누군가의 지도 편달 혹은 노하우 전수가 필요한 시점이 되면 언제나 그렇듯 나의 사수가 짠!하고 나타나 나를 리드해주었다... 가도 또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해?”하며 기분 나빠하기도 했다.
회식이 갑작스럽게 잡혔던 그날도 사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날 헷갈리게 했다. 그래도 회식이 평소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음식점에서 1차, 럭셔리 와인바에서 2차가 진행된다는 걸 알게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는지 내 업무까지 휘릭, 가져가 회식 약속 시간 30분 전에 깔끔하게 모두 해치워 주었다. 이날 회식에는 평소와 다르게 나이 지긋하신 차장님, 부장님에 본부장님까지 참석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와인바가 2차로 잡혔나보다, 생각했다.
2차로 간 와인바는 생전 처음 가보는 분위기였다. 중간에 피아노가 있는 원형 무대가 있고, 타원형 긴 테이블이 그 무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테이블에서는 사람들이 마주 보는 게 아니라 무대 쪽을 바라보며 일자로 길게 앉았는데 조명이 테이블 위만 살짝 비치고 있어 서로 얼굴을 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난 언제나 그렇듯 테이블 맨 끝, 사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했다. 칵테일은 맛보다 모양이 너무 예뻤다. 난 사수에게 속삭였다.
“너무 예뻐서 못 먹겠어요!”
사수는 귀엽다는 듯 볼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비싼거야, 얼른 먹고 또 다른 거 시켜서 먹어봐.”
흔히 예쁜 건 맛이 없다고들 하던데 두세 가지 색깔이 서서히 번져서 섞인 그 칵테일은 예쁜 만큼 정말 맛도 있었다. 새콤달콤, 알록달록 칵테일에 눈과 입을 빼앗긴 난 연신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메뉴판을 뒤적였다. 이렇게 예쁘고 맛있고 비싼 걸 공짜로 먹을 수 있는 회식을 앞으로 더 자주 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때 가운데 있던 무대의 조명이 은은한 보랏빛으로 바뀌면서 무대 바닥은 음악에 맞춰 파도가 치듯 고혹적인 물결 레이져로 가득 찼다. 그리고 다른 테이블의 한두 커플이 무대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고 끈적거리는 음악에 맞춰 마주 본 채 떨어져 춤을 추기도 하고, 또 서로 가볍게 포옹하며 추기도 했다. 난 너무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속으로 “이런 곳에서 어른들은 이렇게 춤추시는구나” 생각하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열심히 무대 위를 구경했다.
한 5분 정도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평소 자판기 커피를 곧잘 사주시던 차장님이 내 어깨를 살짝 치며 다가와 말했다. “어때, 맛있어?” 차장님의 등장에 내 사수는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네, 너무 맛있대요. 이런 거 처음 먹어본다네요. 너무 귀엽죠, 차장님?”
차장님은 나를 사이에 두고 사수와 몇 마디를 나누다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난 어리둥절해하며 사수를 쳐다보았다. 사수는 함께 일어나 무대 쪽으로 나를 밀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아빠 같은 분이신데 뭘.”
무대에 나가 차장님을 반쯤 껴안고 왔다 갔다, 이리저리 스텝을 밟으며 생전 처음으로 블루스라는 걸 췄다. 차장님은 1차 때 고기와 함께 먹은 마늘 냄새를 훅훅 풍기며 어색함을 없애려는 듯 연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 하나 둘 셋, 잘 추네. 춤에 소질 있는데?”
소질은 무슨.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는 건데. 내 사수는 차장의 등장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사수는 칵테일 한 잔에 세상 천진난만해하는 스무 살 짜리 동생 같은 애를 보호하진 못할망정 아빠 같은 분에게 날 떠밀었다. 진짜 아빠는 딸과 이런 곳에서, 이런 술을 먹고, 이런 말을 하며 춤추지 않는다. 그건 사수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부담감과 어색함을 껴안은 채 무대에서 가까스로 내려와 얼음물 한 잔을 마시고 화장실로 향하려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수가 나에게 오라며 손짓했다. 아뿔싸! 사수는 본부장님 옆에 앉아 있었다. 내가 쭈삣뿌짓 다가가자, 사수는 이렇게 말했다. “본부장님, 상큼한 뉴페이스가 왔네요.”
난 또다시 본부장님과 무대로 나가 어기적어기적, 휘적휘적, 덜그덕거리는 블루스를 췄다. 본부장님과 춤추는 게 싫다는 생각보다 방금 들은 사수의 말이 내 온 몸을 휘감았다.
‘아빠 같은 분, 상큼한 뉴페이스…’
그러면서 동시에 아까 회식 전 평온한 얼굴로 내 업무까지 처리해 준 사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수는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던 거다. 나의 입사와 동시에 그동안 회식 자리에서 했던 특유의 막내 역할을 나에게 전가할 기회임을 계산하고 있었던 거다.
그녀도 여자, 나도 여자.
여자에서 여자에게만 내려와 전해지는 이 뭣 같은 전통이 자연스럽게 막내인 나에게 배턴터치 된 것이다.
그분이 아빠 같은 분이라 괜찮은 거라면, 괜찮은 아빠랑 두 분이 더 좋은 시간 가지시지 날 왜 끌어들이는 건지. 내가 상큼한 뉴페이스라면, 좀 더 상큼한 곳에서 칭찬해 주시지 하필이면 그런 곳, 그 타이밍에서 날 왜 부르는 건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만의 독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 버텨냈다.
그 후로 몇 번 더 회식 자리가 있었다. 사수는 그 와인바가 회식 장소 중 하나로 선정되면 그때마다 얼른 내 업무 가져가 탁탁탁, 처리해 주었다. 차장으로 시작해 본부장에 과장들까지, 1년 남짓 몸담았던 그 회사에 다니며 나는 임원진 모두와 한번 이상씩은 블루스를 춰보았다. 그 당시엔 사수가 정말 많이 얄미웠다. 자기가 싫은 걸 남에게 미루는, 속 보이는 여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얼마 안 가 난 깨달았다. 진짜 나쁜 사람은 딸 같은 여직원들과 아빠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한 그들이라는 것을.
그 누가 소중한 딸과 그렇게 끈적한 웃음을 보이며 춤을 출까. 그 어느 딸이 아빠와 그 늦은 시간에 와인바에 가서 그런 춤을 출까. 그 어떤 아빠가 친딸과 와인바에서 부비부비 춤을 출까.
꽃다운 스무 살 딸 같은 나와 춤을 추었던
그 시절의 과장님, 부장님, 차장님 그리고 본부장님. 잘 사실런지
안부차 인사말을 건네본다.
“2023년 요즘, 밥은 먹고 다니십니까?”
* * *
[에필로그]
난 그 회사에 만 1년 동안 몸담았다. 그렇게 원하던 대학 재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나서 몇 년 후, 첫 직장의 사수였던 ‘그분’과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마주쳤다. 사수도 그사이 회사를 나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수는 그때 나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을 직장생활하며 가장 재미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맞장구쳐 줄 수 없었다. 추억은 추억이지만 재밌지만은 않았으니까.
회사를 나와 재수 끝에 대학생이 된 나를 보고 사수는 부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들어갔더라면 몇 학번이었을 거라고 말했는데 난 무척 의아했다. 나와 한 살 터울인 줄 알았는데 빠른 나이였다.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인 셈. 나를 상큼이라 말하며 그렇게 언니처럼 대하드만, 동갑내기였다니 허탈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때 같이 갔던 와인바가 종종 생각난다고. 미친, 하고 나도 모르게 얼굴로 욕했다. 그리고 동시에 속으로 말했다.
“넌 나에게 칵테일을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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