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도서관에 갔었고.
지금 도서관에 있으며,
내일도 도서관에 갈 것이다.
오늘도 도서관에 간다. 작은 도서관부터 시립도서관까지 지역 도서관을 주로 이용한다. 자주 가는 도서관에 원하는 책이 없다면 차를 몰고 다른 구에 있는 도서관에 간다. 서울 끝자락과 경기도 초입 경계선에 살고 있어 운 좋게 두 지역 도서관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초도(서관)세 권’에 사는 셈이다. 양쪽 지역 합쳐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무려 20곳이 넘는다. 이 정도는 자랑할 만하지 않나 하고 남들에게 말하면, 살짝 놀라는 척 해주다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그래, 요즘 도서관 이야기를 누가 재미나게 들어주겠는가? 나는 그 얘기를 또 얼마나 재미나게 할 수 있을까? 양쪽 모두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써보려고 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내 삶 ⅔ 중 가장 중요한 장소였으니까. 첫사랑에게 화이트 데이 사탕을 받았던 곳도 도서관 앞이었고, 처음 스스로 혼자 도서관에 들어갔던 순간의 전율을 기억하며, 오랜 시간 사서가 꿈이었고, 서고 안에 쭈그려 앉아 울기도 하고, 온갖 망상을 펼치며 하염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던 곳이다.
고요하지만 침울하지 않고, 엉킨 호기심을 차분하게 풀어내고 싶을 때마다 그곳에 간다. 독서모임 관련 책을 두 권 쓰고 도서관에서 강의하고, 도서관 북클럽을 진행하고, 도서관에서 돈을 받으며 산다. 특별히 친한 사서 친구들이 생기고, 지역 도서관 운영 위원회 위원으로 분기마다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사서들이 쓴 도서관 책도 넘쳐 나는데 더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지 싶지만, 누구보다 더 새롭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니까, 부디 나의 도서관 예찬이 누군가의 마음에 한자리 찾아들기를 소망한다.
살아가는 동안 애정 하는 공간이 있다는 감사와 기쁨을 담아, 가을에 메일을 보냅니다.
-목 차-
월요일 아침 도서관
화요일 밤 도서관
수요일 낮 도서관
목요일 아침 도서관
*금요일/토요일/일요일 도서관은 연재 후
다른 채널로 선보일 수 있기를 기대해 주세요.
[월요일 아침 도서관]
자리 찾기
도돌이표 일상이 시작하는 월요일, 도서관에 간다. 이 세상 여유로움과 사치는 나 혼자 누리는 듯한 첫 요일의 행선지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평일보다 긴 주말 이틀이 지나고 월요일이 오면 해방의 기분이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한 평안을 느끼게 한다.
두 어린이를 오전 8시 50분까지 등원을 시키고 난 뒤, 바로 5분 거리에 있는 G 도서관으로 걸어간다. G 도서관을 더 자주 오는 이유는 휴관일이 제일 적기 때문이다. 대부분 도서관이 일주일에 한 번이나 격주로 평일 하루 휴관을 하는 반면 이곳은 한 달에 단 하루(일요일) 휴관한다. 휴관일을 잊고 갔다가 철창이 내려진 도서관 앞에서 허탈한 한숨을 쉴 일이 없어 좋다.(하지만 최근에 그 단 하루를 또 잊고, 굳게 닫힌 도서관 앞에 서 있었다.) 한 달에 단 하루만 빼고 매일 도서관이 열려있다니, 그곳이 내 집 앞이라니, 노동자 사서의 입장보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이용자로서 최고의 도서관이다.
도서관 앞,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들고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도서관 1층 자유 열람실 출입구에 도착하니 열댓 명이 줄 서 있다. 각종 국가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 동네 어르신들.(늘 할머니는 없다) 정각 9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살짝 놀랐다. 자리가 저리도 많은데 줄까지 서서 들어갈 일인가? 좋아하는 브랜드 신상을 기다릴 때나, 최애 가수 콘서트 스탠딩 줄을 설 때와 같은 설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늘 앉던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결연한 표정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 매일 한자리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그들에게 자리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내가 눈치 없이 그의 ‘지정석’에 앉게 된다면, 그는 하루 종일 낯선 자리에서 얼마나 불편할까. 내가 언제쯤 일어날지 계속 예의주시하느라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들이 모두 안도하며 자신만의 지정석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대한 천천히 암묵적 비지정석에 앉는다.
도서관 자유 열람실에서 자리 잡을 때 고도의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우선 되도록 바로 옆자리에는 앉으면 안 된다. 일단 노트북을 켜고 작업하는 사람 근처에 앉을 땐 키보드 커버가 있는지 확인하고, 기침을 자주 하거나 휴지를 위에 올려놓은 만성 비염을 겪고 있는 사람 근처는 피하려고 한다. 안 그러면 계속 훌쩍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책을 한두 권 읽고 있는 사람이거나(너무 많은 책을 놓은 이용자는 페이지를 빨리 넘기며 소리를 과하게 낼 때가 있다),시험 준비로 책과 노트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그 근처에 앉는다. 조용히 불타오르는 집중력의 아우라가 내게도 스며들기 바라는 마음으로.
메뚜기처럼 자리를 옮겨 다니지 않으려면 더 자세히 주변을 탐색해 봐야 한다. 한번은 나름 자리를 잘 잡았다 생각하고 앉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용자분이 계속 책을 보며 코를 팠다. 명확하게 말하면 코 주변을 5~6번 매만지다가 한 번씩 콧구멍 초입까지 손가락을 넣었다 빼는 식이었다. 아마도 심한 비염이 있거나 그의 오랜 독서 습관 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눈에 띄자 내 눈이 무의식적으로 자꾸 그를 바라봤다. 자리를 다시 옮겨야만 했다. 그때 이후로 맞은편에 누가 앉아 있느냐도 체크할 사항이 되었다. 지금 앉은 자리는 재빠른 분별력과 축적된 판단력을 발휘해 선택한 자리다.
그렇다면 나는 근처에 앉아도 괜찮을 이용자인가? 사실 내가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을 한다. 비염이 심해 훌쩍거리다, 급작스럽게 재채기를 잘 하며(왜 매번 입을 가릴 두 손은 재채기보다 늦는가?) 책 읽다 다른 책이 생각나 서고를 왔다 갔다 여러 번 일어난다. 허리가 안 좋아 수시로 앉아서 스트레칭한다. 집중력은 어찌 그리도 미약한지 수시로 집중해 공부하는 이들을 쳐다본다. 내 주변으로 가까이 앉은 사람이 없을 때, 순간 모두가 나를 피해 앉은 것만 같다.
도서관에서 자리 찾기처럼 어쩌면 인생은 적당한 자리 찾기 게임일지 모른다. 적당한 타인과의 거리를 수없이 재가며 눈치보고 분석해서 어느 자리쯤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말이다. 나는 지금 이 거리쯤 자리가 만족스럽지만 맞은편 타인은 불편해서 자리를 이탈한다. 그런데 다들 조용히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 이유조차 모르고 앉아 있다. 이번에도 나의 자리 찾기는 실패구나.
적당한 자리가 정말 있는 걸까? 아무리 적당한 거리를 가늠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움직여도 적당한 관계가 깔끔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이 자리가 '나를 위한 적당한' 거리였는지 '너를 위한 적당한'이었는지 혼란스럽다. ‘적당한 거리’라는 21세기 새로운 관계의 기준을 주관적으로 맞추다 ‘적당히 외롭고 말겠어’, 라는 상태가 돼버렸다. 그래서일까…? 가끔 침묵한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둘러앉은 각자의 자리가 섬처럼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편해 보이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도서관의 포용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3분 거리의 작은 도서관을 주로 다녔다. 그 작은 도서관의 공기와 분위기, 심지어 냄새까지 익숙해져 있었다. 이사 온 뒤 G 도서관을 처음 방문한 날, 낯선 쾌쾌한 냄새가 났다. 모든 책을 구입해서 보는 친구가 자신이 도서관에 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불쾌한 냄새 때문이라고 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체취, 오래된 책과 새 책의 불협한 내음. 실은 어느 도서관이나 처음 가면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러다 잠시 책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무취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도서관 공간의 주인이 되어 냄새와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낸다. 그 자리에 속한 나도 원치 않아도 한몫하게 된다. 처음 맡았던 냄새에 익숙해지고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 비로소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을 편견 없이 보게 된다. 이런 무취 상태가 되면 의심의 눈초리가 사라지고, 냄새의 용의자로 보였던 이도 그저 책을 보러 온 평범한 이용자가 된다. 각자가 내뿜는 체취의 합을 다시 균등하게 나눠가졌을 때, 빠르게 무뎌진 후각은 참으로 포용력이 뛰어나다. 역시 모든 포용력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이런 포용력을 자주 느낀다. 더울 때 땀 냄새가 밴 채로 들어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 잠시 쉬어 갈 수 있게 해주고, 찬 바람에 추울 때도 어김없이 따뜻한 공간을 내어준다. 심신이 지친 자 모두 내게 오라는 말처럼 애서가들의 예배당 같은 도서관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그리스도만큼이나 용서도 잘 베푼다. 연체로 대출 금지 상태일 때 이벤트로 대출 금지를 풀어주는 은혜도 종종 베푼다. 상습 연체자에게 은혜라는 표현이 절대 과하지 않다. 은혜를 이리 베풀어도 또 연체하는 죄를 저지르겠지만, 도서관은 그런 그들을 절대 내치지 않는다. 사서들끼리 블랙리스트를 몰래 만드는지는 몰라도 연체자들이 책만 반납해 준다면 ‘너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겠노라’ 다시 책을 빌려준다. 반복되는 회개와 죄 속에서도 도서관은 ‘어제 몰랐던 것 오늘 알았네’, ‘오늘, 도서관 오길 잘했다’와 같은 팻말을 걸고 두 팔 벌려 모든 이를 기다리고 있다.
교회보다도 먼저 도서관에서 그런 따뜻함과 관대함을 느꼈던 어릴 적 나는 학교 앞 손기정 공원 안에 도서관이 개관했을 때 정말 행복했다. 도서관 안의 그 수많은 책이 새책이었다. 모 방송국에서 취재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설프게 책 읽는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앞에 섰던 기억도 난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유심히 보고, 늘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들렸다.
그 도서관은 내게 책을 정말 많이 읽고, 부유하고, 인자한 어느 친척의 집 같았다. 상상 속 교양있고 잘 사는 고모할머니 집 같은 곳. 그런 분이 있다는 것만 알지 만난 적도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그런 멋진 분이 내게도 있다고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존재처럼 도서관은 나의 자랑이었다.
전교에서 두 번째로 작은 아이였다. 엄마 아빠는 가게 일로 바쁘셨고, 서른 전에 아이 셋을 둔 엄마의 고단함과 신경질을 몸으로 받아내던 작은 내게 두 동생은 부모님 대신 돌봐야 할 존재였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잘 웃지 않았고 신나는 기억이 없던 어린 시절, 슬픔과 우울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찍힌 사진 속 내 모습은 지금 봐도 낯설다. 왜 그리도 밝게 웃지 못했을까? 잊고 싶어하는 무의식의 손들은 그 많은 단서들을 마구 찢어 버렸다. 가끔 두렵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무의식에서 깨어나 진실을 마주했을 때 난 그 두려움을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굉장한 방어기제 망각 덕분에 지금 내가 웃고 있을지 모르니 난잡하게 편집된 흐릿한 기억의 결과물을 그냥 받아들이려 한다.
엄마 아빠가 책 읽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삼 남매를 키운다고 온몸이 부서져라 일하던 부모님이 내게 알려주는 세계란 아주 비좁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야 엄마 아빠처럼 고생 안 한다’는 세계. 무섭도록 현실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우주의 세계가 궁금한들 부모님께 물을 수 없었다. 그런 내게 다른 세계로의 초대장을 내밀어 주고, 질문에 답을 주는 책의 집, 도서관은 나를 언제나 포옹해 주었다. 도서관의 넓은 품에 포근히 안겼다.
삽화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두툼한 책을 읽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독후감을 쓰던 어린 나는 그 세상에서만 자유로웠다. 나를 혼내는 사람도, 첫째니 뭐든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도, 이 조그만 골목길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도 도서관 안에서는 모두 사라졌다. 지식과 지혜의 전령들이 만든 책 벽의 미로 안에서 온종일 헤매고 싶었다. 책 속의 이야기는 무한히 자유로웠다. 그런 책을 수천 권 갖고 있는 도서관은 내가 꿈꾸는 집, 부모, 친구, 여행, 꿈, 미래였다. 절대 현실에서 잡을 수 없지만 한없이 아름다운 뜬구름 같은 이상들이 그곳에 있었다. 도서관에만 가면 희망의 구름이 자꾸만 부풀려졌다.
월요일 아침, 듬성듬성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은 자리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잠시 멍 때리고 앉아 있어본다. 무슨 책을 빌릴지도 모른 채,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기다려본다. 목적을 위한 읽기와 글쓰기를 모두 내려놓고 그냥 앉아 기다려본다. 아무 의도 없이 잠시만 자유롭게 떠오른 뜬구름 같은 생각들을 그냥 따라가본다.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고 집중하라는 요일이지만, ‘월요일 도서관’에서는 가만히 안겨 있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