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살구색 손톱이 참 좋았다. 큰 덩치에 굵은 목소리를 가진 그였지만 손톱은 작고 귀여웠다. 두껍고 거친 손가락 사이에 푹 파묻힌 손톱을 보면 다현은 자꾸만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손깍지를 끼고 지문으로 손톱을 문질문질 하면 그의 가장 부드러운 속내를 만지는 것 같았다. 다현은 끊임없이 만지고 싶었고 그의 어딘가에 계속 닿아있고 싶었다.
터벅터벅 유난히 앞발에 힘을 주고 걷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좋았다. 수업이 먼저 끝난 날 그의 자취방 앞에서 기다리다가 골목 끝 코너를 돌기 전부터 그의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다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함께 있는 동안은 거의 옷을 입지 않았다. 한낮의 해가 부엌까지 차고 들어오는 날에도 그랬다. 햇살 아래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잘게 움직이면 마치 그의 몸 전체가 다현을 향해 안달 내는 것 같았다. 낡은 담요 위를 구르며 섹스를 하다 노곤해지면 잠을 잤다. 그의 가슴을 베고 잠이 들면 다현은 앨리스가 되어 불끈불끈 뛰는 토끼 시계 소리를 따라 까만 굴로 뛰어내리는 꿈을 꿨다.
일어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었다. 다현이 밥을 차리면 그가 설거지를 했다. 낡은 주택의 3층 다락방 손바닥만 한 싱크대가 그의 어깨로 다 가려졌다. 다현은 설거지하는 맨몸의 뒤태를 보며 혼자 자위를 했다.
다현은 그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었다.
몇 년 후 다현은 그와 헤어졌다.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겠으나 다현의 이유는 하나였다. 그와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현이 자신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가 아무리 약속을 어기고 데이트 장소에 나오지 않아도, 기념일에 전화 한 통 하지 않아도, 미래에 있기를 바라는 이벤트에 대해 무신경해도, 부모님이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아무 대꾸가 없어도 다현이 먼저 헤어지자고 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듯 언제나 그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현을 대했다.
다현은 미친년처럼 화를 내다가도 다시 그의 자취방을 향했다. 다시 그를 더듬고, 빨고, 삽입하고, 미친 듯이 흔들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그렇게 지내고 나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도 지낼 만하다고, 앞으로는 나아질 거라고, 개밥그릇 앞 파블로프의 개처럼 헉헉거렸다.
달라지는 것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다현은 중독된 것처럼 그를 찾았고 그는 길 잃은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처럼 충직한 주인 행세를 했다. 그는 끌려가는 다현을 어떻게 여겼던 걸까.
어느 날 자취방에서 올려다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해서, 다현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헛되어 보이는 티끌들을 모두 지우고 다른 하늘을 그리고 싶었다. 그날로 도망치듯 자취방을 나와 두 번 다시 그를 찾지 않았다.
물론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그와 재회하는 상상, 밤새 엉켜있는 꿈, 혹시라도 있을 우연한 만남에 대한 갈증은 계속되었다. 어쩌다 그와 즐겨 다니던 동네에 갈 일이 있으면 옷과 화장에 더 신경 썼고 섹종이 친구들에게 먼저 묻지는 못했지만 건너 건너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다현이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
공교롭게도 다현 혼자였다. 남편은 1박만 하는 짧은 출장이었고 민아는 미국에서 온 조카들과 놀고 싶다고 졸라대는 통에 일주일간 외가에 보낸 터였다. 여기저기 살림이 산적했지만 포상휴가를 받은 것처럼 느긋해졌다. 빨래며 청소는 미뤄두고 끼니도 대충 때우며 한나절을 보낸 느긋한 오후, 누군가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화면에 뜨는 실루엣이 생경하면서도 낯이 익었다.
“배송 왔습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때로 눈이 알아채지 못하는 걸 귀가 먼저 알아채곤 한다. 익숙한 목소리. 가슴이 졸여왔다. 그가 왜? 여길 어떻게 알고? 다현은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문을 열었다. 그였다. 헤어진 지 7년이나 지난 옛 연인.
터벅터벅.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그는 오랜만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터벅터벅 집안으로 걸어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파에 툴썩 앉았다.
“선배가 여길 어디라고 와? 미쳤어?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그는 고개를 휘휘 돌려 집안을 둘러볼 뿐 다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택배 송장처럼 생긴 손바닥만 한 종이 위에 받는 이에는 ‘조다현’의 이름이, 보내는 이에는 리스연구소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김오치 이년이. 결국 일을 내고 말았구나.
하지만 그는 김오치를 향해 이를 갈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질문해대는 통에 다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방은? 딸 방? 잘 꾸며 놨네? 누구 닮았어? 너 닮았으면 참 예쁘겠지?”
“역시, 여전히 믹스커피를 좋아하는구나. 내 자취방 식탁에도 항상 이 프림라떼가 놓여있었는데.”
다현은 그를 붙들었다. 안방을 향하던 참이었다.
“왜 이래. 김오치가 뭐 하라고 시켰어? 내 인생 망쳐 놓으래? 나한테 복수하래?”
“복수는. 니가 뭘 잘못했다고. 걱정하지 마. 난 널 위해서 온 거야. 널 만족시키기 위해서.”
“김오치 돌았구나. 만족? 난 분명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도 결국 선밸 찾아가? 찾아가서 뭐라고 했어? 돈 준대?”
그는 안방 앞을 막아선 다현에게 한발 성큼 걸어왔다. 한 뼘 앞에 그의 굵은 울대가 탐스럽게 움직였다.
“난 선배가 아니야. 음, 물론 선배가 맞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선 다른 존재지.”
가까이서 보니 그는 7년 동안 거의 늙지 않았다. 아니, 피부나 체형이 비현실적으로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 듯 보였다.
“난 너의 안드로이드야. 의뢰인 조다현의 엑스맨.”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예전 가장 뜨거웠던 시절처럼 다현이 번쩍 들렸다. 그가 선배의 모습을 한 기계 덩어리라는 말을 다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현의 어깨와 허벅지를 감싼 그의 양팔이 따뜻했고, 다현의 얼굴 반쪽이 닿은 그의 단단한 가슴에서 격렬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다현의 안방은 부부의 침실이었다. 남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침대 위에 다현을 던져놓은 그에게서 조금의 긴장도, 일말의 어색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으론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도 있는 그의 거친 행동이, 다현에게는 지금 놓인 어떤 조건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다현만을 원하는 그의 욕망처럼 느껴졌다. 젊은 날 그 찬란했던 시절에 영원할 것만 같았던 벅찬 감정도 소환되었다.
단숨에 벗어 던지는 티셔츠, 단 두 손가락으로 열어젖히는 청바지 버튼, 그다음 드러난 것은 날렵한 허리 아래 툭 불거진 치골이었다. 다현은 그 부위를 유난히 좋아했다. 저돌적인 피스톤의 저력이 치골에서 나온다고 생각될 만큼 강력한 움직임으로 다현을 언제나 종착역까지 데려다주곤 했었다.
그의 하체를 마주하고, 다현을 붙잡아주던 사명감과 책무가 한순간 아득해져 버렸다. 어떻게 발가벗겨졌는지도 모르게 알몸으로 누운 다현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그의 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꺼져있던 지스팟의 전원 버튼이 켜졌다. 알싸한 자극이 명치를 지나 유두 끝을 찌르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 코끝을 울렸다. ‘미칠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하는 말이 외마디 비명이 되는 순간 다현은 다 놓아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정신줄과,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게 숨어있던 다량의 애액까지.
‘우리 중에 으뜸 또라이는 너였어.’
이 일을 털어놓는다면 친구들은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선배를 가장한 안드로이드라 해도, 집에 들이면 안 되었다. 게다가 한 번은 실수라고 하겠지만, 자정을 넘겨서까지 세 번을 연달아서 하다니. 예상 가능한 비난이 침대 위를 떠다녔다. 얌전한 고양이가 상간남 위에 먼저 올라갔다고 하겠지, 부뚜막보다 뜨거웠냐고 하겠지. 그리고 간땡이가 부었냐고,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으냐고 하겠지…. 만약 남편이 알게 된다면, 민아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져 다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돼.
“으음...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잤어?”
다현이 무의식적으로 흔든 고갯짓에 그가 반응했다. 걱정도 상념도 없는 말간 얼굴로.
‘사랑과 전쟁’, ‘에로부부’ 같은 치정 예능에서나 볼 법한 인서트 컷. 남편이 출장 간 사이, 과거의 남자를 침대로 끌고 들어온 불륜녀의 뻔한 스토리. 그게 진짜가 아닌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상간남의 팔베개를 베고 앞으로 어떻게 빠져나갈지를 궁리하는 여주인공은 치졸하다. 다현은 순식간에 멀미가 올라왔다. 이미 잘못 꿰어진 단추지만, 첫 단추부터 다시 만지작거려봐야 했다.
“선배... 아니, 너의 미션이 뭐지?”
“너? 전엔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일 뿐이라고 다현은 속으로 되뇌었다.
“넌 선배가 아니야. 김오치가 보낸 기계 덩어리일 뿐이지.”
“흐음. 아니야. 난 안드로이드지만, 선배와 97% 같아. 너의 기억을 바탕으로 온갖 플랫폼에서 선배의 정보를 수집해 채워 넣었거든. 요즘 세상이 너무 개방적이어서 말이야,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직장인 하나의 ‘인생’ 정보쯤은 식은 죽 먹기야. 물론 리스연구소는 어느 정도의 해킹도 불사했을걸. 그런 기술 덕분에 네가 알지 못하는 선배의 모습도 충분히 채워 넣었지.”
“선배의 인생에 대해 97% 안다고?”
“아는 게 아니라 같은 거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반응해. 어떤 자극이 있을 때 사고회로가 같으니까 행동도 똑같이 나오는 거야. 오늘 널 보자마자 바로 안아버린 것처럼.”
그가 웃었다. 다현은 그의 오른쪽 입꼬리 끝에 앙증맞게 맺히는 주름 두 줄에 머무는 시선을 급히 거두고는 다시 물었다.
“오케이. 그럼, 선배는 왜 여기 온 거야?”
그는 팔베개를 고쳐 다현을 깊게 안으며 대답했다.
연구소에서 깨어났을 땐 딱딱한 실험실 베드에 알몸으로 누워있었어. 무척 당황했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거든. 사실 난 바로 전까지 어느 한적한 호텔 풀장에서 태닝을 즐기고 있었어. 내 옆엔 열 살이 어린 한 여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전날 호텔 바에서 만났던 애야. 하루 밤새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성에 차지 않았던지, 영 엉겨 붙더라고. 근데 갑자기 알몸의 실험실이라니, 뭔 일이야? 물론 그게 이 몸에 담긴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는 걸 나중에 김오치를 통해 알게 되었어. 아마 나의 분신이 SNS에 올린 가장 최근의 게시물이었을 거고.
다행히 그때 김오치가 들어오더군. 김오치는 융통성이 뛰어난 사람이었어. 부드러운 애무로 긴장을 풀어주고는 너의 이야길 시작했어. 조다현. 김오치의 입에서 너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창고 벽장의 먼지 쌓인 박스에서 오래전 아꼈던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기분이랄까.
김오치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 난 너를 만나고 싶었고, 김오치는 그것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바로 너의 주소를 받아들고 이쪽으로 왔지. 그뿐이야, 내가 온 이유는.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네 기억이 날 부른 거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불렀다고?”
다현은 격렬한 반응으로 놀란 시늉을 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사실 다현은 자주 과거의 남자를 안방으로 소환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이부자리에 그를 눕히고, 그와의 정사를 상상했다. 그게 김오치에게 읽힌 기억이라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현은 터지는 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다현은 한참 울었다. 그러고도 울음이 멈추지 않아 또 한참을 흐느꼈다. 그러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어떻게 그와 헤어지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다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다현이 그런 결정을 할 때 왜 그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다현과 이별할 때 아무렇지 않았는지, 이별 후에 그럭저럭 살만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며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 또한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회색이었던 반투명 창이 새벽빛에 옅게 흐려졌다. 그를 깨워 물어봐야겠다고 다현은 마음먹었다. 구차한 미련 같아 보일 테지만 자존심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다현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를 흔들었다.
“선배, 일어나 봐. 물어볼 게 있어.”
선배의 잠버릇도 복제한 그는 짙은 눈꺼풀을 가늘게 흔들며 눈을 떴다.
“대답해 줘. 선배가 정말 선배라면 솔직하게 얘기해 줘야 해.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응... 뭔데?”
다현은 밤새 준비한 질문을 한 번 더 가다듬었다.
“난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선배는 두말없이 그러자고 했어. 이유도 묻지 않고, 그날 이후론 연락도 하지 않았지. 선배. 그때 왜 날 잡지 않았어? 내가 그리웠다며.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라며. 선배는 나랑 헤어진 거 후회한 적 없어?”
말하면서도 점점 울먹여지는 게 싫어 다현은 목소리를 눌러 말했다. 그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응, 없어.”
응? 다현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왜?”
“할 만큼 했으니까.”
“할 만큼? 뭘 할 만큼 했는데?”
“우린 할 만큼 했잖아. 이년 가까이 사귀면서, 즐거운 날 많았고 행복한 시간 충분했어. 그만큼 많이 잤고, 섹스도 많이 했잖아. 더 욕심내면 그건 좀 과하지. 언제나 최고조에 달했을 때 멈출 줄도 알아야 해. 항상 절정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야.”
할 말을 잃었다. 질문이 그게 아닌데 어째서 그는 깔때기처럼 온통 그 얘기뿐인가.
“할 만큼 했다니. 우린 할 게 더 남았었어. 둘이 함께할 미래나, 결혼 얘기도 그렇고…. 난 선배와 그런 그림을 그렸었는데 선밴 아니었어?”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다현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별을 통보했을 때 보였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결혼은 이미 다른 사람과 해서 잘 살고 있잖아. 근데 뭐가 문제야?”
그때부터 엑스맨은 오래전 다현이 보지 못한 비공개 SNS에 적혀있었을 그의 생각을 나불거렸다. 섹스가 왜 반드시 결혼과 연결돼야 하는지 모르겠으며, 결혼을 통해 일부일처제에 굴복당하고 싶지 않고, 적당히 사귀며 원 없이 섹스하고 적당한 때에 빠져나가는 일상이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했다. 괜히 진지해지는 여자친구에게는 못 알아듣는 척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는 그의 철칙을 가장 위협하는 인물이 바로 다현이었으며, 다현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가 고맙다는 말까지 전하고는 에러를 교정하는 멍청한 표정으로 멈춰 설 때까지, 다현의 생각은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하였다.
찌질한 새끼. 결국엔 즐길 만큼 즐겼으니 나가떨어지라는 거였잖아.
**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벗는 인기척 다음으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남편이다. 남편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원래는 저녁에 오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오기 전에 김오치에게로 그를 데리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해두었다. 가는 길에 다시는 보지 말자고 그에게 말할 것이고, 그를 인계하며 김오치에게는 ‘또 한 번 이런 짓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제대로 경고할 마음을 굳게 먹은 참이었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을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려고 했다. 추억은 되새김질해봐야 토악질 냄새만 날 뿐이며 과거는 현재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으니 뒤돌아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려고 했다. 다현은 급히 이불장의 빈 곳으로 멈춰버린 그를 구겨 넣었다.
남편은 넥타이가 풀어 헤쳐진 채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작은 보스턴 가방에 담아주었던 새 셔츠가 아니라 전날 아침 입고 나간 블루 와이셔츠 그대로였다. 큰 컵으로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제야 다현과 눈을 맞추는 남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녁에 온다더니….”
“아,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아, 있었는데 잘 해결됐어. 회, 회사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좀 쉴게. 괜찮지?”
남편은 혼자 있고 싶다는 내색을 비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말하지 않는 건 남편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럴 때마다 같이 나누자며 종종 투정 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다현도 혼자 정리할 것이 있지 않은가.
다현은 먼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와 뒹군 흔적 위에 남편이 누울 것을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베개와 이불이 제자리를 찾듯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할 때 협탁 위에서 문자수신음이 들렸다. 남편의 핸드폰 액정 위, 빼꼼히 머리를 내민 문자에 김오치의 이름이 있었다.
‘김오치입니다. A/S를 위해 지금 방문 드리겠습니다.’
다현은 그것이 자신의 핸드폰이 아닌지 확인했다. 아니었다. 남편의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왜 김오치가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을까. 그리고 A/S는 또 무슨 말인가.
“오빠가 김오치를 어떻게 알아?”
다현은 기다릴 수가 없어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물었다. 비눗물이 채 가시지 않은 알몸의 남편이 굳어 버렸다. 쏟아지는 물 아래서 남편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며 다현은 분명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버렸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대강 걸쳐 입고 나와 다현 앞에 선 남편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도 기억하지. 그날. 얼마 전 당신이 술에 취해서 무작정 나한테 안겨 오던 날 있었잖아. 사실 나,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했어. 당신이 왜 그랬을까? 내내 궁금했고 또 한편으로 그렇게 터져버린 당신이 안타깝고 미안했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프고, 서글펐어.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아닌가….
난 그동안 당신이 민아 키우느라 힘들고 지쳐서 섹스 생각이 안 나는 거라고 알고 있었어. 솔직히 말해 다행이다 싶었지. 나도 그랬으니까. 회사 일에, 집 대출금 생각하면 섰던 놈도 다시 죽더라고. 그래서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각자 역할에 충실히 살자, 연애할 때처럼 맘 편하게 섹스까지 누리는 건 욕심이다, 나중에 여유 생기면 어디 좋은 호텔 잡아서 다현이한테 제대로 해주자, 그때까지 앞만 보고 달리자! 이렇게 마음먹고 살았었거든. 그런데 아차 싶더라. 당신은 아닌 거 같아서.
생각할수록 점점 불안해지기만 했어. 그런데 그때 연락이 온 거야. 리스연구소에서.
‘[web발신] 아내가 힘들어하나요? 몰랐다면 몰라도 안다면 그냥은 못 지나치는 섹스리스 타파 비법! 지금 특별이벤트에 참여하세요!
- 리스연구소, 문의 전화 010-9876-4321’
조금 망설이다 바로 참여 신청 답신을 보냈어. 그랬더니 바로 연락이 오더라. 섹스리스의 원인 파악부터 치료설계까지 무료로 해주겠다고. 내가 웬만하면 이벤트를 가장한 사기 영업에 잘 당하지 않는데, 그 상담사는 마치 우리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본 것처럼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더라. 홀린 듯이 예약까지 넘어갔어. 그런데 검사를 하려면 1박을 해야 한다는 거야. 뭐라더라. 수면 중에 극대화되는 이드의 충동을 끌어내 리비도를 활성화해야 한다던가, 아무튼. 그게 어제였어. 출장이 아니었고... 거짓말해서 미안. 정말 미안!
실수였다는 거, 리스연구소를 가보고야 알았어. 난 완전히 속았던 거야! 리스연구소 직원들이 검사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아늑하게 꾸며진 침대방으로 날 안내하기 전까지 난 상상도 하지 못했어. 김오치가 거기서 나올 줄은! 걔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 방으로 걸어 들어올 때, 정말 그때 알았어. 이 모든 것이 김오치의 계략이었다는 걸. 김오치가 어떻게 내 상황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모두 김오치의 짓이었던 거야!
다현은 오열하는 남편 앞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김오치가 자신의 기억을 통해 남편에게 접근한 것이 분명했다. 깊은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다현의 손에 남편의 목줄이 감겨있다. 김오치는 다현을 얼마나 더 깊이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릴까. 그리고 무엇보다 김오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쿵쿵쿵. 쿵쿵쿵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사람을 깨웠다. 모니터에는 김오치의 얼굴이 띄워져 있었다. 남편에게 접근한 것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다현은 문을 열었다. 김오치는 와인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9㎝는 되어 보이는 하이힐을 가지런히 벗은 후 마치 스캔하듯이 다현과 남편, 집안의 분위기를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러고는 급히 표정을 바꿨다. 사랑을 잃은 애절한 순정녀의 얼굴로.
“선우 씨,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간만에 레트로 스타일의 섹스를 기대했는데.”
그런 다음 다현에게 몸을 돌려서는 다시 차가운 얼굴을 했다.
“다현 씨는 선우 씨를 얼마나 알아요? 선우 씨가 어떤 서비스를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한 색마의 울음소리를 내는지 알고 있어요?”
후훗, 하고 웃는 김오치에게 다가가 다현은 손을 높이 뻗었다. 가장 큰 반원을 그리며 귀싸대기를 날릴 수 있게. 그러나 다현의 팔은 김오치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오치의 눈동자가 붉은 핏줄에 잠식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였어! 선우 씨한테 너보다 내가 먼저였다고!”
너보다 먼저 만났고, 너보다 먼저 사랑했어. 네가 선우 씨를 처음 만난 그 바, 선우 씨 취향 보고 내가 엄선해서 자주 데려가던 데이트 코스였는데, 거기서 네가 선우 씨를 꾈 줄이야! 네 기억을 보고 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피가 거꾸로 솟고 온 신경이 발끝을 뚫고 땅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 너 알아?
선우 씨는 내가 영구소장하고 싶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였어. 어린 나이에도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진중한 그를 영원히 내 걸로 만들어버리고 싶었고. 선우 씨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빈약한 내 영혼을 채워주는 남자, 몸뿐 아니라 영혼까지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한 단 한 명의 남자! 난 선우 씨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어.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주고 싶었다고! 난 최선을 다했어. 그가 원하는 판타지를 모두 이뤄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그런데도 떠났어.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선우 씨가 떠난 후에 더더욱 성행위에 탐닉하게 되었어. 내가 무엇을 놓친 건지 알고 싶었거든. 선우 씨는 나의 원동력이나 다름없었어. 그를 통해 난 수많은 발명을 이뤄냈고, 혁명에 가까운 섹스학을 개척했으니까. 그런데 너, 조다현, 너의 기억 속에서 그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이 엉망이 됐어!
셧더퍽! 대체 너의 무엇이 선우 씨를 그런 얼굴로 만든 거야? 어쭙잖은 애무, 미숙한 섹스 테크닉, 모든 것이 부족하기 그지없는데 선우 씨는 왜 그런 표정을 지어주지? 너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얼굴, 날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그 얼굴이 날 비참하게 만들어. 난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그 얼굴! 왜 난 안되는 거야, 왜!
그래, 그래서 그랬어. 어젯밤 선우 씨를 내 연구소로 불러들인 건.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어.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서라도 나를 통해 황홀경에 빠진 선우 씨를 말이야. 상상해 봐. 선우 씨가 내 위에 올라타고 초원을 달리는 전사처럼 격렬하게 달리는 상상! 어때? 너도 기분 좆같지?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7년의 안간힘이 하나도 소용없었어. 아무것도 먹히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오마이갓, 말도 안 돼!
내 전라 앞에서 선우 씨는 공룡의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어. 트리케라톱스, 레소토사우르스, 스켈리도사우루스, 안킬로사우루스, 스테고사우루스,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힙실로포돈, 마이아사우라.... 공룡이 끝나니까 이번엔 화초 이름을 대기 시작해. 여인초, 극락조, 아레카야자, 몬스테라, 벤저민, 스투키.... 붉게 올랐던 선우 씨 얼굴이 하얘지고 꼿꼿하게 서 있던 페니스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눈을 질끈 감고 끊임없이 외더군. 그 앞에서 별짓을 다 하는 난 벗어 던져놓은 티셔츠 보듯 하면서 말이야.
죽을 듯이 외우는 이름들이 아마도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과, 네가 좋아하는 식물일 거란 생각이 드니까 미치겠더라.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참고 버틴 거야.
어떻게 그래? 응? 어떻게!
처절하게 울부짖는 김오치를 바라보는 남편은 차갑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현이까지 괴롭히지 말고 내 집에서 당장 나가!”
김오치는 마스카라와 함께 번진 눈물을 비벼 닦으며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모른다고? 선우 씨, 정말 그렇게 믿는 거야? 다현 씨, 정말 대단해. 음흉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지? 남편도, 친구들도.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대체 얼마나 더 속일 수 있다고 믿지? 어젯밤 엑스맨이랑 벌인 광란의 정사는 어쩌시려고?”
김오치는 가방을 뒤져 손바닥만 한 리모컨을 꺼냈다.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버튼을 오래 누르자 다시 녹색 불이 켜졌고, 이불장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모습을 한 엑스맨이 동굴에서 쫓겨난 원시인처럼 헐벗은 채 나타나, 부끄러움을 처음 알게 된 아담처럼 두 손을 모아 한곳을 가렸지만 다 가려지진 않았다.
“자, 인사하세요. 이쪽은 다현 씨의 엑스 보이프렌드.”
이제는 다현이 얘기할 차례였다. 하지만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다시 그에게 흔들렸고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현은 무너졌다. 꽉 쥔 주먹 이외에 어느 곳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떨군 고개 밑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차라리 원망스러운 게 나았다. 그도 끝까지 갔더라면,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 그도 실수했다면, 그럼 이런 절망감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럼 이 눈물은 무엇일까. 참회의 눈물이라기엔 다현은 지금 온갖 두려움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아이가 알게 된다면, 남편이 헤어지자고 하면, 유책배우자가 되어 이혼 소장의 수취인이 되면... 그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나 다현은 손으로 바닥을 문질러 눈물의 흔적을 없앴다. 가증스럽다. 울 자격조차 없다. 그저 조용히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것을 바란다면 종량제봉투를 끌어안고 죽어 마땅하다고 다현은 생각했다.
남편은 엑스맨에게로 다가갔다. 눈에 열기를 가득 담고 입은 꾹 다문 채 그 앞에 선 남편은 오랜 시간 엑스맨을 쳐다보았다. 관찰일기를 쓰려는 아이처럼 꼼꼼하고 집요하게. 그러고는 “너구나”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그의 멱살을 높이 들어 올려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남편의 분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표출되는 동안 에러가 시작된 엑스맨은 이런 상황의 대처법에 대한 데이터를 찾지 못하는 듯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말랑했던 외피가 찢겨나가고 차가운 금속의 선들이 튕겨 나올 때 즈음 남편은 그가 다현과의 연애에서 지겹게 따라다녔던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니라 한 덩어리의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오치는 호탕하게 웃었다. 본인의 작전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괴이하게 번진 마스카라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제 알겠지, 선우 씨? 당신이 아내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
흉하게 뭉개진 엑스맨의 얼굴 부위를 오래 바라보다가 또 오래 말을 잃은 듯 다현을 응시하던 남편의 눈은 이내 집안 곳곳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물건들을 향했다. 민아의 어린이집 가방, 싱크대 수전에 널려있는 행주, 누군가의 엉덩이 모양으로 숨이 죽은 소파 방석 같은 것들을 찬찬히 보다가 다시 다현에게 눈을 돌려 한참을 머물었다.
“어때 선우 씨? 이래도 참을 건가? 공룡 이름이나 외면서?”
김오치가 재촉했다. 남편이 냉랭한 목소리로 다현에게 욕을 퍼붓기를 바랐을 것이다. 남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처량하게 쓰러져있는 엑스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이 섹스토이, 오치 씨가 만든 건가? 아주 제대로 만들었네요. 감쪽같아.”
훕, 하고 큰 숨을 들이켠 남편은 김오치를 향해 말했다.
이제 알겠어.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나한테만이 아니라 내 아내, 다현이에게 한 짓까지 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한 짓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어줄게. 다시는 우리 앞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난 널 잘 알아. 네 탐욕은 항상 상대가 진절머리를 치며 도망칠 때까지 멈추지 않지. 넌 옛날부터 그랬어. 네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맞는 거로 만들어버렸잖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에든 불에든 뛰어들고 보는 그 성격, 지긋지긋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게 과연 뭘까. 넌 뭘 증명하고 싶은 거지? 섹스리스 부부는 섹스에 목말라 있어서 미끼만 넣어주면 사족을 못 쓴다, 이런 거? 그러다가 결국 파국을 맞고 만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야?
김오치. 이제부터 내가 할 얘기, 똑똑히 들어.
결혼까지 할 정도로 진지한 관계라면, 섹스 말고도 공유하는 것이 아주 많아. 네가 아무리 이런 더러운 장난질을 해도 나와 다현이 사이는 까딱도 하지 않을 거야. 왜냐면 7년의 시간 동안 섹스의 횟수는 줄었어도 늘어난 게 한두 개가 아니거든. 우리 두 사람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끈 같은 게 수도 없이 많아서, 섹스라는 끈 하나 시들해졌다고 해서 틀어질 관계가 아니게 되어버린 거지.
예를 들어줄까? 그중에는 다현이가 입덧하는 동안 나도 같이 입덧하며 생긴 끈도 있고, 민아 낳고 다현이 젖몸살 마사지해줄 때 얼굴에 모유 범벅 되면서 생긴 끈도 있고, 나 업무 스트레스로 턱 돌아갔을 때 다현이가 삼시 세끼 내 입에 미음 넣어주며 생긴 끈도 있어. 그런 거야, 넌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거. 그러니 오버할 거 없어.
엑스맨? 고작 옛 남친이나 본뜬 섹스토이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어차피 이 섹스토이는 그저 성감 버튼일 뿐이야. 다현인 마음이 동해야 거기가 젖거든? 과거의 추억, 첫사랑의 달콤함. 흥건해질 정도로 충분히 자극적이긴 하지.
엑스맨은 딱 그 정도야. 그렇지, 다현아?
남편은 평소보다 톤을 높여 얘기하면서도 특유의 느릿한 속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들렸다. 지금 남편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다현은 목울대가 얼얼해지며 미간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제야 똑똑히 알게 된 사실들을 하나씩 머리에 떠올렸다. 우리 부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 불안은 어느 날 ‘섹스리스’라는 단어를 듣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게 리스연구소를 만나면서 더 정점을 찍었고, 그 불안이 과거로 스스로를 잠식시켰다는 것까지.
하지만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정사는 사실이니까.
쉽게 물러설 리 없는 김오치가 다현을 다그쳤다.
“다현 씨. 니가 얘기해 봐. 얘가 섹스토이였어? 넌 진짜였잖아. 섹스가 그만큼 중요했잖아!”
남편과 사는 동안 그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힘들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하지만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를 그리워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아니었는데도,
어제는 참 좋았다. 부인할 수 없는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현은 말했다.
“그건 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섹스를 잘하도록 프로그래밍한 상품이어서야.”
뻔뻔하게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현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
“김오치. 네 말이 맞아. 어제 ‘진짜’ 좋더라. 그래서 결심했어. 둘이서 해결하려고만 하지 않고,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요즘 성인용품도 다양하고, 아직 도전해보지 않은 섹스 판타지도 꽤 많이 남았거든.”
다현과 남편을 번갈아 보던 김오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둘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다현아, 다음 주에 쇼핑하러 가자. 성수동 카페 골목 뒤쪽 성인용품 샵에 일본에서 건너온 물건 많대.”
남편은 맨살의 엑스맨을 일으켜 샤워가운을 입혀준 후, 김오치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르랑거리는 엑스맨의 기계 소리가 잠든 아기의 숨결 같았다.
**
땅거미 지는 어스레한 시간에 만나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남편이 오후 반차를 내준 덕에 가인이 방송에 처음 출연하는 역사적인 날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현은 몇 년 만에 맞춰 입어본 하프 팬츠와 롱부츠를 쇼윈도에 비춰보았다. 친구들이 예뻐졌다고 하려나. 다현은 경쾌한 굽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조금 높였다.
약속 장소는 작은 칵테일 바였다. 아일랜드 바를 제외하면 테이블이 두 개뿐인 이곳은 화영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화영이가 특별히 저녁 대관을 부탁했다고 했다. 먼저 도착한 화영과 늘희가 두 개의 테이블을 붙여놓고 여러 종류의 술로 테이블 세팅까지 마친 상태였다. 벽 한 면이 와이드 스크린으로 꽉 차 있고, JTBC 뉴스룸 타이틀이 오른쪽 상단에 걸린 채 광고가 한창 상영되고 있었다.
“가인이 통화했어? 안 떨린대?”
“응. 메이크업이 과하다고 짜증 내던데? 지우고 자기가 다시 했대. 지 같지가 않다나 뭐라나.”
“가인이답다, 다워.”
푸훗, 하고 같이 웃는 소리에 긴장이 한층 풀렸다.
가인의 곁에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였고 가인은 창당을 결심했다. ‘다양하당’이라는 당명은 가인의 남편, 무성 씨가 지었다고 했다. 잠시 후 뉴스룸 인터뷰에서 창당 스토리를 들려줄 예정이다. 다현은 샴페인 한 모금을 홀짝 마시고 안부를 물었다.
“요즘은 어때? 다들 괜찮지?”
화영인 샴페인을 소주처럼 원샷했다.
“야야야, 부작용도 그런 부작용이 없다. 리스연구소 내가 고소할까 봐!”
“왜, 무슨 일이야?”
화영이가 혀를 쭉 내밀었다. 피어싱이 사라지고 없었다.
“말도 마.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성욕을 나눠서 똑같게 해 준다고? 세상에, 탈탈 털렸어! 바닥이 나버렸다고! 내 성욕이 오빠한테 싸그리 옮겨 가버려서, 나 이제 저성욕자래!
오빠는? 성욕이 흘러넘쳐. 요즘 아주 내 아랫도리만 붙들고 산다! 내가 원할 땐 그렇게 안 해주더니만 이제 내가 도망자 신세야! 예전 오빠 심정을 알겠어.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오고, 맨날 소파에서 잤는지. 이제는 내가 이 방 저 방 숨어 자느라 온몸이 쑤셔. 망할 김오치! A/S 신청했는데 연락도 없고!”
화영은 회음부가 너덜너덜해졌다며 고관절과 사타구니를 꾹꾹 마사지했고, 늘희는 그런 화영의 어깨를 톡톡 토닥이며 화두를 이어받았다.
“안 그래도 나도 김오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연락 취해봤는데 안 되더라? 같은 팀원이 전화를 당겨 받았는데 연구소에 거의 안 나온대. 휴가가 아니고 무단결근이라던데? 팀원 말로는 파일럿 테스트 중인 안드로이드를 집에다 들여놓고 거의 밖을 안 나온다네. 집에서 뭔 짓을 하는지.”
다현은 엑스맨과의 정사에 관해 몸소 연구하고 있을 눈 풀린 김오치가 상상되어버려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엑스맨에 대해 알 리 없는 두 친구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넌 왜 김오치를 찾아? 너도 무슨 일 생겼어?”
늘희는 부쩍 밝아진 안색이 더 환해졌다.
“AR 렌즈 한 세트 더 할까 싶어서. 구매했을 때 두 개 한 세트였거든. 뒀다가 남편한테 한 번 더 쓸까 하다가, 너무 궁금한 거야. 도대체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매번 처음처럼 달려드나? 싶은 거지. 그래서 남아있는 한 세트를 내가 써봤어. 그런데, 어쩜 이러니? 난 까무러치는 줄 알았어!”
늘희는 배신감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이 환상적으로 보인 건 맞아. 그런데 그게.... 베네딕트 컴버배치더라고!”
가장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을 던져놓고 늘희는 한동안 음미하는 듯했다. 평소 늘희는 베네딕트와 한 번만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었는데, 그 염원을 이뤄낸 황홀한 얼굴을 했다. AR 렌즈는 배우자의 리즈 시절을 되돌려준 것이 아니라 평소 자위용으로 즐겨 보았던 섹스파트너와 ‘하게’ 해주는 기능이었다.
“그럼 남편 눈에도 다른 여자가 나타났던 거야?”
“응. 그이는 한두 명이 아니드만. 이효리, 한소희, 메간 폭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일본 AV 배우들까지. 매번 다른 사람이었대! 참나, 어이 상실도 유분수지! 억울해서 나도 부지런히 다른 남자 찾으려고!”
때마침 앵커가 가인 부부를 소개했다.
“오늘 뉴스룸 인터뷰 코너에서는 부부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두 분을 모셨습니다. MSTI라는 새로운 섹스유형 분류법을 개발하며 섹스리스 부부들의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는데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창당까지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다양하당’의 공동대표 우가인, 김무성 부부를 만나보겠습니다.”
화면 속에서 가인은 무성 씨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가인의 미소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흔히 부부의 성생활에 대해 물을 때 뭐라고 하나요? ‘부부관계가 어떠세요? 부부관계 원만하신가요?’라고 묻죠. 우리는 부부 사이의 섹스 활동에 ‘부부관계’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여러분은 이거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부부관계’가 정말 섹스 여부 하나로 귀결되나요? 부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관계인데, 저는 왜 섹스로 그 관계를 정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는 섹스보다 더 큰 세계입니다. 저희는 단지 섹스리스 부부를 대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제대로 정의해보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당차게 자기 생각을 전하는 가인, 그리고 가인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소중한 친구, 화영과 늘희. 다현은 친구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빨갛기만 했던 섹종이가 다양한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고 조금 알딸딸한 기분이 되었다. 이 정도라면 용감하게 망가질 수 있겠다 싶은 취기였다. 다현은 남편에게 ‘지금 출발!’이라는 문자를 보내고 화영과 늘희에게 말했다.
“나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남편이랑 약속이 있어서.”
“이러기야? 뭔데, 뜨밤이야?”
야릇한 미소만 남긴 다현의 뒷모습은 한껏 설레어 보였다. 새로운 섹스 툴을 시도해보기로 한 날, 다현은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