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좋았다
그토록 폭 빠질 줄 몰랐다. 무대 위에만 오르면 몸이 하늘로 두둥실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고, 관객들 앞에만 서면 아무리 대사 한 줄만 주어진 작은 역할이라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에 단 한 번뿐인 라이브, 코 앞에 있는 관객과의 교감, 극을 통해 만나는 또 다른 내 모습, 하나의 이야기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밤새워 연습하는 열정... 모든 게 미치도록 좋았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평생 ‘연극’, 이 두 글자를 끌어안고 가겠다고. 하지만 그 찬란한 결심은 대학로 생활 5년 만에 뿌리째 뽑혀 흔들거렸다. 원인은 ‘돈’이었다.
2007년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진지하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양가 부모님께 손 벌릴 형편은 아니었기에 미래 계획이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원의 월급과 이제 막 대사 한 줄을 받아 든 연극 배우의 출연료를 대충 계산을 해보니, 아니, 계산할 것도 없었다. 답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곳은 오롯이 둘의 힘으로 살아가 보려는 신혼부부에게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혼자 서울로 올라와 자취생활을 오래 한 남편은 지하, 반지하, 고시원, 옥탑방 등 다양한 주거환경을 경험한 탓에 신혼집만은 꼭 자가로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남편과 따스하고 편안하고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 집값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비웃듯이 계속 올라갔고 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비부부 특유의 유쾌함으로 힘을 내보기로 했다. 각자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하지...?’ 라는 찜찜한 의구심과 찝찝한 물음표만 남긴 채 그렇게 진지한 대화를 씁쓸하게 마무리했다.
난 알고 있었다. 내가 결단을 내야한다는 걸. 말은 연극 배우였지만 1년에 작품 하나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마저도 분량이 많지 않은 조연이나 단역인 나에게 칼자루가 쥐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 연극 배우 출연료는 형편없었다.
3개월 동안 공연을 해도 3개월 분의 출연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작품당 출연료를 받았다. 예를 들어, 한 작품에 30만 원이라는 출연료로 계약하면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는 3개월 동안의 총수입이 30만 원이 되는 셈이었다. 주말 회차에 관객석이 만석이 되면 배우 모두에게 만석 기념 보너스 봉투가 똑같이 쥐어졌는데 이마저도 적으면 1만 원에 많으면 2,3만 원 정도였다.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연극‘이라는 두 글자를 평생 끌어안고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날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극‘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는 일이 주어진다면, 그 일로 생계유지를 할 수 있다면 뭐든 열심히 해보기로.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연극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연극예술강사와 연극을 통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연극치료사 일이었다.
연극예술강사는 유치원부터 초, 중, 고, 특수학교 등의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예술교육을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을 말한다. 연극은 물론 영화, 국악, 무용, 만화애니메이션 등 총 여덟 가지 분야의 예술강사들이 있다. 난 대학로에서 활동한 모든 공연을 증빙해 현장 이력자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2007년 서류심사와 면접 끝에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소속 연극예술강사가 되었다.
이 글은 그때부터 내가 ’강사‘로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물론, 갑질이 주제이니만큼 따스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강사로서 겪은 모든 일들이 억울하고 짜증나고 갑갑하지만은 않았다. 이제부터 꺼내놓는 이야기들은 뿌듯하고 밝은 경험들과 함께 한, 그 사이사이에 존재한, 극히 일부분의 어두운 이야기이다.
한승태 작가의 <인간의 조건>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꽃게잡이 배 선원이나 양돈장 똥꾼처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의 숙소는 어느 정도 크기인지, 여름엔 얼마나 덥고, 겨울엔 얼마나 추운지. 사람들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꿈은 무엇인지, 식사로는 어떤 음식이 나오고 급여는 어느 정도인지.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도구는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등등…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잊힐 게 분명한 사소한 사항들로 책을 가득 메우고 싶었다.’ _<인간의 조건> 중에서 / p7
나도 누군가에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잊힐 게 분명한 사소한 사항들로 글을 메우고 싶다. 학교에 나간 예술강사가 쉬는 시간에는 어디에서 대기하는지, 모닝커피는 어떻게 먹는지, 급식은 어떻게 먹는지, 예술강사로서의 대우는 어떤지... 등등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지만 말하고 싶고, 또 궁금해하지 않지만 기록하고 싶었다.
’연극‘이라는 두 글자를 품은 직업을 선택한 후, 나는 점점 빛이 나는 을질러가 되었다. 4대 보험이 아닌 3대 보험만이 적용되고, 한 달에 59시수 이상 수업을 하면 안 되는 일. 10년 넘게 일해도 퇴직금이 ’0‘이며 17년 동안 딱 한 번 강사료가 오른 일. 매년 새로운 계약서를 써야 일할 수 있는 비정규노동자도 아닌, 아르바이트보다 근로 보장이 되지 않는 초단기 근로자 자격으로서 하는 일. 그 일을 하면서 점점 움츠려드는 을질러가 된 것이다.
점점 말이 길어진다. 이제 풀어보겠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누구도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들을.
학생을 가르치지만 선생은 아닙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라는 속담이 있다. 하던 일을 자주 바꾸면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극선생님으로 불린 지 17년째인 나는 과연 성공했을까. 성공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일단 눈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결과인 ’돈‘으로 따져보자.
2023년 한 해 동안 번 돈을 연봉으로 따져보니 세전 금액으로 7,568,000원. 12개월로 나누면 매월 63만 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는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연극예술강사로 <그림책 연극수업>과 <그림책 예술놀이>라는 책도 2권이나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돈‘으로만 따져보자면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한참 멀다.
나는 학교에 나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난다. 교시마다 정해진 학년의 학급 교실에 들어가 수업하고 다시 다른 학급으로 가서 수업한다. 방과 후 강사로 많이 오해받곤 하는데, 그와 다른 점은 정규교과 수업 시간에 한 학급 학생 모두를 만난다는 점이다. 예술강사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교직 이수‘ 여부이다. 교직 이수를 한 예술강사를 선호하는 학교들이 많고, 소속기관에서도 그런 예술강사를 더 많이 양성하려 한다.
연극 배우로서의 현장 경험을 인정받아 예술강사가 된 나같은 연극선생님에게는 무척 불리하면서도 의아한 일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대화하다 보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교직 이수하셨어요?”라는 질문이다. "아니오, 예술 관련 전공을 공부하긴 했지만, 교직 이수는 안 했어요. 대학로 배우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아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아, 예...”하며 약간 선을 긋는 느낌.
예술교육도 교육이니 교직 이수가 필수인 걸까. 아니면 자유로운 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이니 예술가들도 할 수 있는 것일까. 난 이 두 개가 적당히 버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예술 교육을 한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 분야의 교육적 방법론을 배우거나 공부해 학생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예술 교육을 행해야 한다.
아무런 예술관련 경험 없이 '교직 이수자'로서 예술 교육을 한다면 하고자 하는 예술 분야를 몸으로 직접 체득하고 체험하는 과정을 필수과정으로 넣어야만 한다. 그래서 책으로만 배운 예술교육방법에 경험한 것을 적용해 자신만의 예술교육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나같은 생각을 가진 이는,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다.
S초등학교에 출강했을 때의 일이다. 난 초등학교 수업은 늘 블록 수업으로 진행한다. 블록 수업이란 1교시와 2교시를 붙여서 수업하고 중간에 있는 쉬는 시간 10분만큼 수업을 일찍 끝마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3학년 1반을 1교시와 2교시에, 3학년 2반을 3교시와 4교시에 연달아 수업하는 것이다. 그 학교에서 맡은 학년은 5학년, 총 4학급이었다.
1,2교시 연달아 5학년 1반 수업을 하고, 중간 쉬는 시간 20분을 가진 뒤 다시 3,4교시 5학년 2반을 만나려고 하던 참이었다. 5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이자 5학년 주임 선생님께서 나를 향해 걸어오셨다. 그리고 복도에 날 세워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1,2교시 연달아 수업하라고 했습니까? 10분 일찍 마치니 애들이 교실에서 떠들지 않습니까? 수업을 제시간에 시작해서 제시간에 끝내야지요.”
난 이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사전방문을 한 후에 담당 선생님께 차시별 간단한 수업 내용과 함께 블록 수업으로 수업을 진행할 거라 공지를 드린 상태였다. 난 당당하게 말했다.
“선생님, 블록 수업에 대한 건은요 미리 사전 방문할 때부터 담당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또 해당 학년 선생님들께도 공지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어느 학년을 맡든지 다 블록 수업으로 연극 수업을 진행해요. 예술 수업 특징상 40분씩 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이제 막 집중이 될 때 맥이 끊겨서...”
선생님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연극 선생님, 교직 이수 안하셨지요? 교원자격증 없으시죠? 선생님,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초등학생 수업 1교시를 40분으로 정한 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걸 외부강사인 선생님이 어기면 되겠습니까? 교육학을 모르셔서 그래요. 80분 연속 수업은 연극 수업이든 뭐든 집중력을 흩트려 놓습니다. 교육청에서 1교시를 40분으로 정한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저명하신 교육학 박사, 석사님들이 정해놓은 건데 왜 선생님이 그걸 어깁니까? 다른 학교는 맘대로 하셔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40분씩 끊어서 수업을 해주세요. 그게 맞습니다.”
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술교육을 15년을 넘게 한 사람이라고도, 예술교육 관련 책을 2권이나 낸 작가라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초등학교 교사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연수를 했는지도, 내가 얼마나 예술교육에 진심인지도 어필하지 않았다. 딱 한 마디 했다.
“네, 선생님. 앞으로 40분씩 끊어서 수업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지만,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에게 나는 그저 교직 이수를 안 한 외부 강사였다.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학생에게 훈계하듯 말해도 되는,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외부 강사였던 것이다.
그날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S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출강일이었다. 학생들과 아쉬운 이별 인사를 나누고 그런 일을 당하니 조금은 덜 억울했지만, 기분은 더 더러웠다.
S초등학교는 집에서 도보로도 출강가능한 가까운 학교였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한 번도 S초등학교 배치요청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 학교 복도를 걷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피해는 학생들의 몫이 돼버렸다. "내년에 또 올 수 있으면 올게!"라고 인사를 했었는데, 아쉽다.
모쪼록 나 다음에 배치받은 S초등학교 연극 선생님은 교직 이수자이셨기를. 저명하신 교육학 박사, 석사님들이 정해놓은 40분 수업을 딱딱 끊어서 연극 수업을 잘 진행하셨기를. 그래서 학생들이 예술 활동에 집중도 잘하고 예술적 감수성을 자유롭게 펼쳤기를.
빨간 옷을 입을까요, 파란 옷을 입을까요.
학생들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 내용과 예술 활동을 이끌어가는 역량과 마인드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옷차림‘이다. 너무 선생님다워도, 너무 예술가다워도 안 되는 옷차림. 눈에는 띄지만 튀지 않으면서 평범한 듯 특별한 인상을 주는 옷차림은 분명 연극수업에 도움이 된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학년에 따라 혹은 수업 내용에 따라 마치 교실이라는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인 듯 표정, 소품, 교실 등장 동선까지도 미리 계산할 때가 있다.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옷차림인 것이다. 모노톤의 옷을 입기도 하고 원색의 옷을 입기도 하는 등 나름 신경을 쓰며 수업을 진행한다. 특히나 저학년을 만날 경우엔 알록달록한 옷으로 시선을 끌기 위해 빨갛거나 샛노란 상의를 입기도 한다.
서울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한 지역의 D초등학교에서 수업할 때의 일이다. D초등학교는 새벽 일찍 첫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오전 7시 10분에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타야했다. 1시간 남짓 달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택시를 타고 학교 앞까지 이동했다. 그래야만 9시에 시작하는 1교시 수업을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쉽지 않은 원거리 학교였다. 학교 규모는 매우 작은 편으로 나는 총 3학급으로 구성된 1, 2, 3학년 친구들을 모두 만났다.
한적한 시골 학교의 저학년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는 화려한 의상을 일부러 챙겨입고 갔다. 자연 속에 위치한 학교의 특징에 맞춰 다양한 자연물을 다룬 그림책으로 수업했는데 그 컨셉에 맞게 매번 옷을 골라 입었다. 하루는 프린트가 화려한 셔츠나 온통 샛노란 색의 티셔츠를 입었고 다른 날엔 빨간 카디건에 빨간 머리띠를 하고 가는 등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런 나에게 친구들은 무척이나 친밀감을 표현했다. D초등학교 수업이 반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담당 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 교무실 한 켠에 있는 교사 휴게실로 나를 불러 커피를 대접하시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매번 이렇게 먼 우리 학교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필 이렇게 먼 학교에 배치가 되서… 그런데요, 선생님. 한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이런 말씀드려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서울에서 오실 때요... 옷이요... 조금 차분한 색상의 옷으로 입고 오시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순간 커피를 마시다 멈칫, 했다. 내가 입고 오는 옷 색깔이 화려한 편에는 속했지만 전문 공연 의상이나 보기 드문 특이한 패턴이나 디자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색이 밝다면 밝은, 아무나 입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한두 벌 정도는 갖고 있는 그런 옷이었다.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 제 옷이 좀 화려하죠, 선생님. 제가 평소에는 이렇게 안 입는데 D초등학교 올 때는 나름 좀 신경을 쓰고 옷을 입고 와요. 아이들하고 수업하는데 자연 그림책이나 색깔 그림책을 읽거나 또 자유롭게 그리는 활동이 있어서 일부러 입고 왔어요. 제 옷차림이 좀 불편하셨군요, 선생님. 죄송해요. 다음 주엔 제가 쉬는 시간에 갈아입고 수업하거나 할게요.”
선생님은 내 대답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아니,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서울에서 힘들게 오시는 선생님 옷차림에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그게 아니고요. 그게, 정말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는데... 여기가 좀 시골이라 그래요, 선생님. 그게... 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원색을 좀 싫어하세요. 그중에서도 빨간색... 교장 선생님께서 빨갱이를 싫어하시거든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원색. 빨간색. 빨갱이?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교무실에 계시는 선생님들 옷이 온통 그레이, 브라운, 블랙, 혹은 화이트. 색감 있는 옷을 입은 사람은 나, 분홍색 뿐이었다. 선생님은 입으로 ’빨갱이...‘라고 내뱉은 게 자신도 민망하신 지 연신 커피잔을 드셨다.
그날 이후 수업하러 교실로 들어설 때 겉옷을 입고, 수업을 다 하고 교실 문을 나설 때 겉옷을 벗었다. 나에게 옷차림에 대해 말해야만 했던, 말하면서도 민망해하셨던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배려를 해드려야 했다. 선생님 또한 옷 색깔에 대해 지적하긴 쉽지 않으셨을거다. 개인적인 의견 피력이 아닌 누군가에게 하달받은 내용을 나에게 전달하는 난감한 입장이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수업이 계속되면서 교실 문에서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처음엔 귀찮고 어이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기분이 묘하게 불쾌해졌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몇 번 더 수업하다 보니 학생들 또한 무채색 계열 옷만 입고 등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이런 학교가 있다니, 이런 인식을 가진 교장 선생님이 계시다니. 기분이 더 불쾌해진 이유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자체를 이 학교에 있는 모든 선생님이 암묵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안에서 교장의 위치는 기업에 비교하면 사장과도 같은 것 같다. 사장의 기호에 따라, 인식에 따라, 입맛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따라가는 것처럼 학교 또한 교장 선생님의 스타일에 따라 학교 규칙이나 분위가가 달라진다. 물론, 모든 학교가 다 그렇진 않다. 다행이다. 하지만… 가끔 꼭 있긴 하다.
다 내 탓입니다.
J초등학교는 내가 꽤 오래 출강한 학교 중 하나로 몇 년간 연극예술 강사로 출강하는 와중에 3번 넘게 교장 선생님이 바뀌었다. 나에게 주어진 수업만 하고 바로 학교 밖으로 나오기에 학기 중에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이 중간에 바뀌어도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다.
해가 바뀌고 처음으로 J초등학교 첫 수업이 있던 날, 언제나 그랬듯이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담당 선생님은 물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 얼굴 도장도 찍을 겸, 첫 수업 시작임을 보고도 할 겸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2학년 2반 담임으로 아침 시간에 등교하는 학생들 맞이로 바쁘실 게 분명하기에 살짝 얼굴만 비치고 바로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계시는 교무실로 향했다. 첫 수업날 인사드리기는 매년 행해지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것이다.
먼저 교무실에 계시는 교감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작년에도 계셨던 교감 선생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씀드리고 교장 선생님이 계시는 교장실 문을 향했다. 똑, 똑, 똑.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그 사이 교장 선생님이 바뀌셨는지 낯선 얼굴이었다.
“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저는 올해 J초등학교에 *년째 출강하고 있는 연극예술강사입니다. 올해도 재배치 되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오늘이 첫 수업날이고요, 올해는 5학년과 6학년 연극수업을 맡았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내 인사말에 대답 대신 짧은 침묵과 함께 깊은 한숨을 들려주셨다.
“... 하아... 여기가 그렇게 막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거든요.”
순간 이해를 못 했다. 막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밖에서 교감 선생님께 인사도 드리고, 교장 선생님이 계신 지 여쭤본 후에 정중하게 노크도 하고 들어왔으니까.
“네? 저 노크 하고 들어왔는데요, 선생님.”
“아니, 그게 아니라.. 연극선생님이라고 했죠? 담당 교사가 누구지?”
“네, 제 담당 선생님은 2학년 2반 선생님이신데요, 담당 선생님께는 더 일찍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아침에 학생들 등교 맞이에 바쁘셔서 일부러 먼저 들려서 짧게 인사를 드리고 왔는데, 왜 그러시는지...”
“말이 안 되잖아요. 교장실에 외부 강사를 이렇게 막 혼자 인사 보내는 게.
연극 선생님도 아셔야 해요, 다른 학교에 가서는 이러지 마세요.”
점점 험악해지는 교장실 분위기가 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대체 뭐가 잘못인 건지, 내가 뭘 어떻게 잘못한 건지. 나의 잘못은 이어진 교장 선생님의 말 속에 빡빡하게 나열되었다.
“아니, 교장실에 올 때는 담당교사가 미리 사전에 약속을 정하고, 담당교사가 같이 내려와서 ’이 분은 이러이러한 선생님이십니다‘ 하고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에 선생님이 나한테 인사를 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선생님이 교장실 문을 열고 와서 다다다 인사를 하면 되겠어요? 내가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네. 담당 선생이 2학년 몇 반 선생님이라고요? 도대체 왜 외부 선생님들은 이런 사전 교육을 안 시키는거야, 정말. 기본 아닌가, 기본.”
와. 이럴 수가. 교장 선생님은 나를 경우도 없고 기본도 안 된 외부강사로 낙인 찍어버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불쾌감을 퍼트리며 전화기를 들고 계신 교장 선생님께 대답했다.
“교장 선생님, 많이 불쾌하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드릴게요. 담당 선생님은 아무 잘못 없으세요. 사전 방문 때는 방학 기간이라서 교장 선생님을 못 뵈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바뀌신 줄도 모르고 있었고요. 제가 한 번 더 와서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첫 수업날 인사하러 온 제 잘못입니다. 담당 선생님은 아이들 등교 맞이하시느라 정신없으신 것 같아서 제가 교장실에 인사드리러 간다고 말씀도 안 드리고 그냥 혼자 온 겁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첫 출강날 혼자서 교장 선생님께 인사드렸거든요. 그래서 올해도 그렇게 인사드려도 될 거로 생각했어요. 다 제 불찰입니다. 기분 푸세요, 교장 선생님. 제가 다 잘못한 거 맞습니다.”
굴욕적이었다. 치욕적이었다. 하지만 아무 잘못없는 담당 선생님께 불똥이 튀기는 건 굴욕, 치욕보다도 더 싫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게 느껴질 정도로 한 권위적인 인간에 대해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난 고개를 조아렸다. 15분 뒤 1교시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연극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정색하며 화를 내봤자, 당당하게 항의를 해봤자 손해는 내 몫 그리고 학생들 몫일 게 분명했다.
교장실에 끝까지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나와 곧장 담당 선생님 반을 향했다. 그 사이 교장 선생님이 담당 선생님께 전화를 하면 어쩌나 조바심이 들어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뛰어넘었다. 난 담당 선생님께 방금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며 죄송하다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교장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모두 다 제 탓으로 돌리시라 말씀드렸다.
나야, 일주일에 한두 번 수업하러 학교에 오기에 1년에 몇 번 교장 선생님과 마주칠 일이 없겠지만, 담당 선생님은 정규 선생님으로 학교 안에서 오가며 교장 선생님과 부딪힐 일이 많으실 게 아닌가.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실지 생각하니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담당 선생님은 베테랑이셨다. 불안감과 죄송함에 말까지 더듬거리는 나를 다독거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괜찮아요. 많이 놀라셨구나. 벌써 알고 있어요, 이번 교장 선생님이 유독 유별나시다는 거 이미 다 파악했어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원래 그런 분이셔요. 첫 수업날 인사드려도 되고, 혼자 교장실 가서 인사드려도 되는 거 맞아요. 그냥 이런 스타일도 있구나, 하고 넘기세요. 아셨죠? 그렇게 큰 잘못 하신 거 아니에요.”
원래 그런 분, 이라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원래 그런 분이라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원래 그런 분이라 더 허탈해 해야 하는 건지. 잠깐의 혼란 속 안도감이 몰려와 나이 마흔 넘은 다 큰 어른이 눈물 흘릴 뻔했다. 그리고 이어진 건 자괴감과 수치심.
첫 수업날이던 그날, 1교시부터 6교시까지의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마음 가득 눈물을 담고 울렁이는 감정을 애써 잠재우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내 모습만 떠오른다. 그날 밤, 남편에게조차 겪은 일을 이야기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날 게 뻔했고, 눈물이 나면 속상할 게 뻔했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이 보일 반응은 뻔했으니까.
- 비 오는 날, 대기할 곳이 마땅치 않아 우산을 쓴 채 운동장 한 켠 정자 아래에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오돌오돌 떨었다는 내 말에 그는 당장 때려 치우라고 했다.
- 수업을 마치고 KTX역으로 향하는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에 몇 대 없는 시골 버스를 향해 무단횡단을 하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트럭에 치일 뻔한 얘기를 했을 때도 그는 내일 당장 때려 치우라고 했다.
- 80분 내내 만든 작품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로 학생들과 마무리 인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오는데 교실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던 선생님이 “자, 책상 위 쓰레기 얼른 버리고 다음 수업 준비하세요.”라고 말해서 속상했노라 말했을 때도 그는 이제 그만 좀 때려치우라고 했다.
- 더운 여름 날, 하필 교실 에어컨이 고장나 선풍기를 틀었는데 방향이 모두 학생들을 향해 있어 등줄기에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데도 마이크를 찬 채 열심히 수업을 했는데 옆에서 아이스커피 속 얼음을 빨대로 돌려가며 쪽쪽 빨아드시는 선생님이 얄미웠다 말했던 그날에도 그는 제발 부탁이니 때려 치우라고 했다.
일한 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쌓은 경력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존중받는 것도 아니고, 단지 ’연극‘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있어 좋아한다는 ‘연극예술강사‘일을 남편은 마땅찮게 생각했다. 그러니 ‘관둬’나 ‘그만 일 해’도 아니고 ’때려 치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이번 일 만큼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때려 치우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 때려 치우고 싶어질 것 같아서. 정말 정이 뚝 떨어질 것 같아서.
때려 치울 수 있다.
17년 동안 일했지만 때려 치울 수 있고, 17년 동안 일했기에 때려 치울 수 있다. 하지만 때려 치울 때 때려 치우더라도 이렇게 때려 치우고 싶진 않다. 누구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가 아닌 그저 내가 ’이만하면 됐다‘ 했을 때 스스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박수칠 때 떠나라‘, 라는 말처럼 나 스스로 손뼉을 칠 수 있을 때 난 ’연극‘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지냈던 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다.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 순간이야말로 빛나는 을질러로 눈물겹게 보낸 나날들을 보상받는 시원한 마무리일 테니까.
그야말로 최고의 커튼콜일 테니까.
* * *
🔹심야메일 시즌3 줌토크에 초대합니다.🔹
11월 25일(토) 밤 9시
회의 ID: 779 794 6941
암호: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