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밤의 피난처
아이들과 남편에게 책임과 의무로 지은 저녁밥을 차려주고, 반납할 책들을 잔뜩 가방에 넣고 나왔다. 이틀 전 남편과 다툰 이후, 마주 앉아 밥 먹기가 데면데면해서다. 나는 자꾸만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진다.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는데, 집에 묶여있는 끈은 이리도 짧아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결국 또 도서관에 왔다.
한산한 평일 저녁,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거리를 걷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도 금세 틈이 열린다. 그 틈 사이로 이야기가 흘러나와 글이 쓰고 싶어진다. 제주도 돌문화공원에 갔을 때 가이드분이 말했다. 왜 제주도에 쌓인 담벼락 돌 사이마다 구멍이 보이는지 아느냐고. 센 바람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오히려 틈이 있어야 한단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 날 무너뜨리지 못할 틈이 생겼다.
밀린 책들을 반납하고, 책이나 훑어보려고 노트북도 종이 한 장도 없이 나왔는데, 꼭 이렇게 장비 없을 때 더 쓰고 싶다. 사서에게 A4 이면지를 몇 장 달라 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쓰기 시작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말이다. 오랜만에 키보드가 아닌 펜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평일 저녁인데도 사람이 많다. 시간에 따라 새로운 사람이 드나든다. 이 시간에 정기간행물 쪽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는 중년 남자는 어디에 있다가 이곳에 온 걸까? 각종 시험공부를 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이용자들 중에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 지금 자면 밤에 잠이 안 올 텐데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여자는 엎드려 자고 있다. 다들 뚜렷한 목표로 이 저녁에도 열심히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있다. 저녁도 안 먹고 싱숭생숭한 마음 달래려 도서관에 온 여자는 나밖에 없는 것 같다.
이틀 전, 남편은 도대체 왜 정리를 똑바로 하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읽지도 않는 애들 책이 왜 이리도 많냐, 다 갖다 버려라. 왜 피아노 위에 책을 이렇게 많이 쌓아두냐며 불평을 해댔다. 난 정말 정리를 못하는 게 아니다. 그의 높은 정리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 일뿐. 3시간 정리하자 피곤해져 일찍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이상하다. 분명 정리는 나보다 그가 더 잘하는데 왜 자꾸 나에게 시키는 걸까?
『태도의 말들』에서 성격은 생존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글을 봤다. 대체 그는 어떤 생존 위협을 느꼈기에 이리도 정리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까?(진지하게 물어보니 정리가 안 된 상태를 보면 정말 화가 난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평생 살아와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보지 못했단 말이다. 난 이렇게 무질서 속에서도 재밌고 막힘이 없단 말이다.
그 책에는 평생 굳어진 그 성격을 고치라 말하는 것은 무리라고 쓰여 있다. 서로 참 무리하며 산다. 우리 사이에도 거센 불화의 바람이 빠져나갈 작은 틈이 필요하다. 책 두께 정도 되는 작은 틈이.
자료 검색대 옆에 신문물이 들어와 있다. <Flybook Screen>이라고 책을 추천해 주는 기기다. 터치스크린 첫 화면에 ‘무슨 책을 읽고 싶나요? 나와 꼭 맞는 책을 만나보세요!’라고 적혀 있다. ‘추천받기’를 터치하니 성별에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져 있다.( 성별 선택 안 함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자, 40대를 누르니 다음 화면에 ‘당신은 연애 중인가요? 결혼하셨나요?’라고 묻는다. 선택에 솔로/ 행복한 연애 중 / 깨 볶는 결혼생활 중/ 자녀와 함께 행복한 가족 이 있다. 이런 선택지에 내가 누르고 싶은 곳은 없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냥 연애 중/ 무자녀 결혼생활 중/ 자녀와 함께 결혼 생활 중 이라고 하면 될 것을! 그래도 어쩌겠나? 자녀가 있다는 팩트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없기에 4번째 칸을 터치했다.
‘당신은 요즘 어떠신가요?’에 여러 감정 표현과 이모티콘이 나왔다. 슬퍼요/이별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외로워요/불안해요/답답해요/..... 답답해요를 눌러야 할지 외로워요를 눌러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얼마 전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모든 고통의 보편성은 ‘외로움’이라고 읽은 게 떠올라 ‘외로워요’를 눌렀다. 그다음 ‘당신의 요즘 관심사를 알려주세요!’ 질문 아래 여러 분야가 나왔다. 미술/과학/경제/재테크/자아 찾기/관계, 소통/.... 그래 터치! 관계 소통을 누르니 장르를 고르란다. 마음의 외로움을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으리, 무조건 문학이지!
짜잔!
안. 나. 카. 레. 니. 나.
가정을 버리고 도망친 안나카레니나. 그러다 결국 자살한 그녀의 삶을 읽어보란다.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본다본다 하면서도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건 또 어찌 알았을까. 40대 기혼여성이 신점을 보러 갔다가 요즘 사는 게 좀 그래요라고 말하는 순간 무당이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구먼!하고 떄려 맞추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줄거리를 다시 찾아보았다. 안나의 아들과 나의 아들이 동갑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그 유명한 문장을 반박하기는 어려우나, 내가 그 정도로 불행한가? 안나처럼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들까지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외로운가? 난 그저 정리 기준이 달라 투닥거리다 온 여자인데...
“10분 후에 마감하겠습니다.”
9시 50분이다. 금세 두 시간이 흘렀다.
집에 어서 들어가란다. 안나처럼 사랑에 빠질만한 남자를 도서관에서 찾지 못하고, 대단히 두껍고 유명한 책을 추천받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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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 드디어 책을 읽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안나가 아니라 레닌에게 굉장히 공감했다. 제목이 왜 레닌이 아닌가? 톨스토이가 마지막 8부에 굉장한 공을 들였다더니, 나도 8부에서 레닌의 깨달음에 감탄하고 말았다.
'나 역시 이성으로 자연력의 중요성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답시고 똑같은 짓을 했던 건 아닐까?' (523쪽)
문제와 고통이 있을 때마다 '이성'으로만 해결하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분석하고 사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끝없는 애씀. 거기에는 일말의 사랑도 없었다는 사실. 가차 없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 채 가차 없이 이성으로만 모든 걸 대하려던 모습.
레닌에게 이성의 저편은 교회, 종교적 충만함, 믿음에 더 가까웠겠지만 무신론자에 가까운(이상한 말이지만 백 프로 무신론자는 아닌 것 같다.) 내게는 사랑이라고 이해됐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의 역사>,난다, 97쪽)
관계의 어려움을 파헤칠 때마다 철학과 심리 온갖 이론과 통계를 보면서 타인을 이해하는 척 굴었던 나는 사랑을 발명할 힘은 없었다. 이성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고 심오해진 내 표정에 나조차 질려버린다. 나와 타인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짓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 대신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채워야 하는지 고민했다.
시간이 지나고 책 추천 기기는 사라졌다. 역시 책 추천은 함부로 해주는 게 아닌 걸까. 남편과 전보다 편하게 잘 지내며 살고 있다. 그 책 덕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사사롭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관계의 부정적 감정을 잊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고, 안나보다는 레닌 덕분에 삶의 중요한 지점을 깨달았다. 고통을 망각하기 위한 독서는 나의 건강한 회피행동이 됐다. 그저 책 한 권에 나를 위한 문장이 하나는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로 계속 읽어나간다. 도서관은 그런 내가 혼자 가기에 가장 가깝고 안전한 밤의 피난처다.
밤의 도서관
어둠이 내리고 도서관에 불을 밝히면, 바깥세상은 사라지고 책들만 잔뜩 쌓인 이 공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구엘
어쩐지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책 보는 사람은 온갖 세상살이와 떨어진 먼 곳에 와 있는 사람 같다. 도서관 문만 열면 휘황찬란한 재미를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밖에 있지만, 책들로 둘러싸인 성벽 안 고요한 요새에 스스로 들어앉은 이들. 밤의 도서관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의 고요한 눈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각자 크고 작은 현실적인 욕망을 품고는 있겠지만 어쩐지 그 욕망들도 도서관 안에서는 작은 소망들처럼 보인다.
밤의 도서관에서는 책에 취한다.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가 흐려져 관대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저자의 글들이 한껏 멋스럽고 이해가 잘 된다. 한낮 또렷한 시선의 날카로움이 노곤한 밤에는 흐릿한 시선으로 너그러워진다.
깜깜한 밤 따뜻한 조명 아래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취한다. 독서가의 나르시시즘이 밤의 도서관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사색가이고, 독서가이며, 지성인이로소이다.
여기 그런 마음으로 도취된 알베르토 망구엘은 밤의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도서관이 자신과 함께 무너져 죽은 후에도 책과 함께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고. 좀 많이 도취되신 것 같다.
늦은 밤 10시. 도서관의 시간도 끝이 났다. 수많은 글자를 먹고 묵직해진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고, 책과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고 이용자들은 밤의 도서관을 떠난다. 몇몇 얼굴은 낯이 익다. 지하 1층 도서관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던 그는 무채색 얼굴을 하고서 내일도 두툼한 수험생 문제집을 펼치고 같은 자리에 앉겠지. 도서관 마감 시간에 일어나는 이들 대부분이 세상이 정한 기준의 시험을 준비한다. 매일 고단한 항상성을 견뎌야 하는 그들에게 대가 없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분명 절대 필요한 곳이다.
온라인 도서관 민원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왜 도서관이 고시원이 된 거냐고. 신간 도서에 왜 공무원 수험생들 책이 있냐고. 이 고독하고도 외롭고 어지러운 도시에서 절대적 환대와 안전함을 제공하는 공간은 도서관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도서관이 수험생의 공간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두를 품은 환대의 공간으로 도서관을 꼽는 나는 이런 글들을 볼 때마다 씁쓸하다.
하지만 도서관도 늘 이 환대의 선을 어디까지 둬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도서관 운영 위원회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하면 각종 민원사례를 듣게 되는데, 쉽게 판단해서 결정 내릴 수 없는 난해한 사안들이 많다. 도서관에서 너무 조용하길 요구하니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다 하고, 도서관 음악회를 열면 도서관이 시끄럽다 민원이 들어온다. 왜 도서관에 범죄 경력이 있는 특정 종교인이 쓴 책이 들어와 있냐고 항의해서 책을 빼면, 왜 도서관은 그런 책을 금지해서 정보의 자유를 침해하느냐 한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늘 고민이다. 민원을 넣은 소수의 강한 목소리에만 좌지우지될 수도 없는 일. 결국 많은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도서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몇 년 전, 시청에서 처음으로 열린 도서관 정책포럼에 갔었다. 문헌정보학과 교수, 정치인, 도서관 관장, 사서, 도서관 자원 활동가, 도서관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과 도서관 관련 글을 올리던 나의 트친님까지 함께 하는 자리였다.
포럼의 주제는 ‘도서관은 정확히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였다. 도서관과 가까운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여러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자리였다. 그때 받은 책자의 도서관 이용률 분석 표를 보니 가장 이용률이 높은 연령대는 30~40대, 직업은 전업주부와 자영업자란다. 서울시민의 도서관 이용 목적은 ‘정보 요구’(53.7%)가 1위였다. 책 대출은 28%로 2위였다.
현재 사람들이 인식하는 도서관은 조용히 공부하는 곳, 약간의 소음도 소름 끼치게 큰 소리가 되어 긴장과 적막이 감도는 공간이다. 이제 이용자들은 편안하고, 다채로운 북 큐레이션으로 좀 더 전문성이 돋보이는 도서관을 바란다.
단순히 정보 이용 공간을 넘어서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까지 원하는 발언들이 계속됐다. 사람들의 독서력이 향상될 수 있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와주길 바라고, 평생교육에 걸맞은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원했고, 문화에 소외되는 지역 사람들을 위해 예술교육지원과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방안까지. 포럼에서 도서관을 향한 다양한 바람과 문제점을 듣던 한 정책관이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들은 이런 것까지 도서관이 해주길 바라는 걸까요?” 그는 너무 많은 요구에 다소 놀란 것인지 짜증이 난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책을 대여하고, 공부하는 장소 이상의 것들을 요구했다. 도서관이 책을 보관하고 마음껏 볼 수 있는 한정적 공간으로만 남아있길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연대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해주길 바랐다. 도서관이 주민센터처럼 행정적인 일까지 해주길 원했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해 주고 알려주고 제안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왜? 그 많은 부분들은 사실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하고 있는 것들인데 말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여러 다른 공공기관보다 도서관을 더 친근하고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서관은 늘 관대하고 가장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곳이니까. 무엇보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것들에는 아쉬움이 없길 바라니깐.
세계 5대 도서관 중 하나인 뉴욕 공립 도서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보면 지역 작은 도서관부터 뉴욕 도서관까지 다양하게 특화된 도서관이 나온다. 문화복합공간을 넘어 직업훈련소, 직업 안내소, 이민국, 장애복지센터, 문화 예술진흥원, 아트센터, 학교와 유사한 역할을 맡는 공간으로 열려있다. 이민자와 여러 인종이 사는 뉴욕 지역 특수성 때문에 생긴 독특한 도서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도서관이 책 빌리고 공부하는 장소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가까운 공공장소 같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지은 집처럼 도서관은 시민들을 환대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부러우면서 그 정책관의 질문이 떠올랐다. ‘도서관이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할까요?’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어느 정도 한계와 선을 이미 그어놓은 듯한 질문. 숫자로 물든 능률주의 시스템의 잣대를 도서관에게까지 들이밀며 이용률을 따져 묻고(매일 도서관 이용자 수를 기록한다) 작은 도서관 폐관, 기능 변경을 지시하는 서울. (그 지역 관계자들은 그저 도서관 이용 목적을 독서실로 바꾸려고 한 것뿐이라고 했다)
사회가 시민들에게 베푸는 환대의 공간으로 도서관이 존재한다. 내가 평생 내는 세금과 비교해 봤을 때 도서관에 빚진 느낌을 받는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단 한 번도 이 공간을 이용하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손에 붙어 있다시피 스마트폰을 쥐고 있어 책을 가까이하기 힘든 지금, 독서율 감소와 더불어 점점 도서관 이용률도 감소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용률 감소에 따른 도서관 통폐합과 공간 기능의 변화만이 답일까?
작은 도서관은 오랜 시간 여러 운영 관련 문제점이 있었지만, 풀뿌리 독서문화를 가장 영향력 있게 펼칠 수 있는 공공 기관이다. 갓난아이를 데리고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애서가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내 주변에는 작은 도서관을 다니면서 우울증이 나았다는 분도 있다. 그분은 결국 사서 2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 지금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계신다. 나 또한 집 앞 작은 도서관 덕분에 마음껏 책을 빌려읽고 독서모임을 꾸리다 이렇게 책도 쓰게 됐고 도서관 운영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규모와 시설이 좋은 도서관이 있어도 내 집과 가장 가까운 곳이 최고의 도서관이다.
작은 사랑방 같은 단골집, 작은 도서관만이 가지는 친근한 공간을 없애려고 하는 결정에 우리가 슬픈 이유는 도서관이 사라지면 결국 그 공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까지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프랜 리보위츠가 말했다. “책을 버릴 수가 없어요. 사람을 버리는 것 같거든요.” 책도 그러한데 책과 사람을 품은 도서관이 버려지는 것은 더욱 마음이 아프다.
도서관 공간뿐만 아니라 도서관 시간의 소멸도 두렵다. 밤 시간(8시~10시)까지 도서관에 찾아오는 이가 없다면 밤 도서관은 사라질 것이다. 공간은 사람이 채워져야 존재할 수 있다. 나는 밤의 도서관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사람들이 매일 밤의 도서관을 채워주길 바란다. 그래서 가장 무해한 방식으로써 고독한 세상의 고단함과 절망을 책으로 달래는 이들이 밤에 찾아갈 수 있는 공간, 밤의 도서관이 계속 존재하길 바란다.
도서관이 밤 10시까지 열려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 놀랍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낸 뒤 오는 헛헛함과 후회스러운 말의 가벼움을 달래려 잠깐 들른 밤의 도서관. 나의 하루 마지막 종착지인 도서관에서 언어의 무거움을 품은 책들을 가만히 들추며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늦은 밤의 도서관이 도시의 등대처럼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어줘서 고마운 날이다. 당신도 만약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도서관에 가는 길 깜깜한 밤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반짝이는 책의 유성들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라면, 진정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밤의 도서관에 머물 수 있는 시공간이 계속 되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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