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키우며 약 3년 동안 다섯 줄 이상의 글을 쓰지 못했다. 좁은 아파트 안에 갇혀 어서 밤이 되기만을 바라던 시간, 축축 꺼져가는 몸을 이끌고 한숨 쉬며 밥 차리던 시간, 누구와 대화할 수도 가만히 책을 읽을 수도 없던 시간. 내가 아닌 것 같던 시간 속에서, 글이라는 건 써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문자로 적었다면 아이를 돌보는 일과를 강박적으로 적은(이유식이나 수면시간) 데이터였다. “소고기미역국에서 고기 뱉음. 밥 먹다가 묽은 똥 쌈. 아침에 우유 200리터. 크림소스 브로콜리 닭고기볶음 실패.”
지나치게 시시콜콜한 기록의 다른 버전으론 배설을 쏟아낸 일기가 있었다. 돈 버는 남편을 측은하게 여기며 챙겨주라고,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똑같은 애 엄마 되었다라고, 주변인들은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당시 말라가던 늦가을의 이파리 같던 멘탈과 몸 상태였던 나는, 잘게 잘게 부서져 갔다. 다른 여자들도 다 하는 걸 웬 엄살이냐며 아무도 불쌍히 여겨주지 않을 때, 억울함이 북받쳐 최대한 불행해 보이고자 글에서도 꺽꺽 울었다. ‘이래도 내가 안 가엽다고?’ 당시에 쓴 일기엔 조울증에 시달리던 괴물 한 마리의 울부짖음이 있다.
“어으 …아으으…저…. 크크크크…윽… 으…그…..어어어…프아아아!.” 나도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몰랐다.
엄마 노릇의 압력을 가뿐하게 무시하기엔 숨통을 트여줄 공간이나 관계가 없었다. 내가 속한 세계는 24평의 아파트와 스마트폰으로 바라보는 맘카페가 전부였다. 세상과 연결된 좁은 창문으론 엄격한 소아과 의사들의 지침, 엄마와 아내 역할을 큰 분열 없이 수월하게 해 나가는 듯이 보이는 체력 좋고 자신만만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찌르르 젖이 돌면서 온몸에 생기가 샘솟는다는 엄마, 매끼 다른 반찬으로 질리지 않게 차려주었더니 아이 식습관이 좋아졌다는 엄마, 아이에게 분리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일 안고 있다는 엄마,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 다니면서도 대단히 만족한 듯 보이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세상. 매끄럽게 다듬어진 정보 속에서 저마다 은밀히 가지고 있을 법한 일탈 행위는 보이지 않았고, 그들과 비교하며 나를 탓했다.
내 안엔 불순한 감정이 널뛰고 있었다. 아이가 환하게 웃을 땐 세상을 다 얻는 것 같았지만, 집에서 아이만 보고 있을 때면 내가 이룬 걸 모조리 잃은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아이를 두고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읽었던, 출산과 육아 경험을 기록한 대부분의 글은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전혀 모르는 듯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 누구도 여자가 엄마가 되고 겪게 되는 고통과 환희를 나란하고 공평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 됨의 기록엔 이런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 육아 효능감으로 가득 찬 글. ‘나는 아이를 책 좋아하는 아이(밥 잘 먹는 아이, 영어 잘하는 아이)로 만들었고 성공했다!’ 두 번째, 아이를 키우며 겪는 여성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 첫 번째 부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질투심과 열등감에 시달렸고, 결국 모조리 끊었다. 두 번째 부류는, 찾을 땐 반가웠으나 이내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막 아기를 낳고 키우던 2014년 이후, 페미니즘 담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엄마, 아빠, 자식으로 이루어진 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공고했다. 엄마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 여자의 역할은 굳건했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되는데, 가정 안에서 직무엔 충실해야 해.’ 육아와 일의 균형이라는 그럴듯한 거짓말. 여자들의 목소리라며 쏟아져 나온 글 속에서도, 여자들은 자기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경력 단절을 극복해 바깥일을 하게 되더라도,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남편에게 여자로 사랑받는 선에서만 해야만 할 것 같은 자기검열이 걸려 있었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해요.” “그럼에도 아이를 사랑해요.” “남편이 안쓰럽고 고마워요.” 자신이야말로 과로사하기 직전임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뭘 읽어도 뾰루지 안에 고인 노란 고름을 아프고도 시원하게 짜주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쿡 찔러 검은 피를 좔좔 흘려주며 뚫어주지 않았다. 상처에 습윤밴드 붙인 다음, 위에 컨실러 덕지덕지 바르고, 파우더로 뽀송뽀송하게 마무리했다.
다른 글을 원했다. 화목함이나 정상성으로 수렴하여 결국 내 자리를 확인하게 만드는 글이 아니라, 모든 전제를 의심하여, 안전하게 굳어 가는 정체성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글. 피부 위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좋은 엄마라는 자의식을 꼬챙이로 확 잡아채 불판 위에 올려 바싹바싹 태워버리는 글. 그런 글을 찾고 싶었고 쓰고 싶었다.
* * *
아이가 세 돌이 될 무렵, 수면 부족과 만성 피로와 우울증에 극약 처방을 실시했다. 모든 맘카페를 탈퇴하고 육아 정보 블로그 구독을 끊었다. 스마트폰을 없앴다. 차라리 택한 고립에서 자유가 생겨났다. 남들과의 비교, 남들의 간섭을 끊어내고 나에게 집중할 자유. 그제야 내 눈 앞에 펼쳐진 세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다. ‘저기 피골은 상접하고 아랫배만 출렁거리는 애 엄마 하나가 바닥을 긁으며 울고 있구나. 애새끼는 쌀을 바닥에 뿌려대며 신나서 괴성을 지르고 있고.’
배설과 신음에서 벗어나 글이 될 수 있는 단어와 조사와 동사를 조합했다. 엄마로서 무엇을 해야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아니라, 지금 내가 겪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썼다.
엄마 됨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나를 건드려주는 글을 찾아내야 했다. <엄마 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이 있다. OECD국가에서 출생률이 가장 높은 이스라엘. 한국처럼 노키즈존은 상상할 수도 없고, 사회 전체가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간다. 그런데 육아 천국인 그곳에서 엄마가 된 걸 후회한다는 여성들의 인터뷰가 책에 실려 있다. 그 책을 읽고서야 감히 고백할 수 있었다. 나도 엄마가 된 걸 후회한다고.
“아이를 사랑하지만, 엄마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역할과 부담, 희생, 기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끊임없는 걱정, 간섭과 배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자식이 사라진다 해도 엄마라는 변함없는 진실, 세상에 내놓은 한 존재에 대해 평생토록 감당해야 할 짐이 엄마됨을 후회하게 한다.
인간이라면 온갖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고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따를 수 있는데, 유독 엄마들에겐 엄마라는 이유로 부정적 감정은 일절 느껴서도 간직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숨어서 죄인처럼 고백해야 한다. 죄책감과 우울감은 이 지점에서 증폭된다. 감정을 부인하면서. 나만 비정상이라고 느끼면서.” <엄마 되기의 민낯 (신나리)>
엄마 됨을 후회한다는 말할 수 있었던 건, 아이를 낳은 걸 후회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한다는 양가감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로, 행복한 엄마라는 말로, 복잡한 감정을 부정하거나 은폐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엄마 됨을 후회한다고 말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가 생명 자체를 돌보는 데서 오는 육체노동보다, 좋은 엄마 노릇과 세트로 딸려 오는 아내 노릇이라는 무게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릇에서만 벗어난다면 양육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모성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능력 그 자체로 아이들과 맺는 관계의 잠재성을 향유하는 모성이다. 한 생명을 보살피고 키워내며 갖추는 강인한 힘이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나워지고, 새끼를 독립시키려고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버리는 매정한 암컷들의 모습이다.
다른 건 제도로서의 모성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성애 이데올로기’다. 여성을 집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존재로 못 박고 남성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작동한다. 여성은 온화함과 다정함, 포용과 이해, 보살핌과 헌신의 상징이 된다. 아이를 그냥 키우는 게 아니라 ‘잘 키우라고’ 말한다. 잘 키운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 무난히 적응하여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고, 그래서 버리고 싶던 건 제도화된 모성이었다. 그러나 매 순간 두 가지 모성은 같이 작동하며 나에게 엉겨 붙는다. 나를 괴롭히는 건 등으로 들러붙는 아이의 몸뚱이인가, 아니면 오늘 저녁에 봐주어야 하는 아이 숙제와 학업 성취인가. 놀아달라고 떼쓰는 아이의 투정 자체인가,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에게 외로움이란 트라우마가 생길지 걱정하는 망상인가. 버거운 건 저녁 밥 차리기 노동 자체인가, 배우자나 아이가 나를 평가할 시선인가.
두 번째 책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에서 밥 안 먹는 아이와의 씨름을 다음과 같이 썼다.
“꾹꾹 억누르며 다독여 왔던 그간의 불만과 불평과 짜증이 자기 연민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오기에 안성맞춤인 시점이 되어버렸다. 손수 시리얼로 아이 아침을 챙기고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 보내주는 대한민국 1퍼센트 남편과 사는데도 넙죽 엎드려 감읍하지 못하는 나, 어질러진 집구석을 내 일이라고 여기며 군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치우지 못하는 나, 여기에 관대하거나 쿨하지 못하고 까칠하며 까다롭고 예민한 여자라는 자기 비하까지 더해졌다. 싱크대에서 배수구 망을 들어올리고 헛구역질을 참으면서 구린내를 풍기며 발효되는 밥풀을 떼어내고 헹구며, 혼자 씩씩 거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모성애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의 압박을 어깨 위에 무겁게 짊어진 이 시대 비운의 여성으로 나를 정체화했다.” <여자, 아내,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신나리)>
윗글을 쓸 때, 단지 밥투정하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엄마 됨의 기준에 미달하는 자신에 대한 비하와 연민에 찌들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글에서 이걸 구분하게 되자, 이전까지 가졌던 터무니없던 비장함과 우울함이 한 겹 걷어졌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단지 매일의 밥하기가 아니라 ‘좋은 엄마 되기’라면 그건 버리면 그만이었다. 좋은 엄마처럼 밥하기가 아니라 그냥 밥을 하면 되는 거니까.
엄마 됨을 쓰기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를 쓰는 과정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아이 앞에서의 ‘나’를 쓰기다. 자신의 분열된 상황과 감정을 담아내는 일이었다. 이런 글쓰기를 할 땐, 세상이 찬양하는 모성을 포기하고 내 알몸을 마주해야 한다. 효능감은 둘째치고 매번 자신의 실패와 만나야 한다.
그러나 실패를 쓰는 일은 자기희생처럼 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 러딕이 말했듯이 나의 무력감과 권력을 같이 인식해야 한다. 제도화된 모성 앞의 나의 무기력함과 함께 잠재적 힘으로서의 모성 사이를 오고 가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마음뿐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던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걸 써야 한다. 어떻게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