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어디까지 살아봤니
여섯 살 무렵, 나는 개봉동에 있는 반지하 집에 살았다. 반지하 집은 말 그대로 반은 지하에, 반은 지상에 위치한 집이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집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으로 햇빛과 바람이 한쪽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 반지하 집에 살며 나는 개미유치원에 다녔다. 그 시절 유치원 등원길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아침마다 선생님이 골목골목을 돌며 집 앞에서 아이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쪼르르 밖으로 나와 선생님과 손을 잡고 다음 아이 집으로 함께 향했다.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골목길을 들어서고 나갈 때마다 선생님 양손엔 아이들의 손이 하나둘, 달랑달랑 길게 이어졌다. 매일 아침 줄줄이 사탕이 되어 다녔던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할 즈음 우리 가족은 이사했다.
이사를 간 집은 개봉동의 반지하 집보다 더 이상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택시회사 주차장을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주유소로 향해야 했다. 주유소 2층이 바로 집이었기 때문이다. 다섯 살 터울 언니와 나는 택시가 오가는 주유소를 마당으로, 택시가 길게 한 줄로 세워진 주차장을 놀이터로 삼으며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아이들이 살기에는 위험하고 적절하지 않은 거주지였지만 나에게 있어 그 집은 세상 즐겁고 특별하고 신기한 기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의 휴게실엔 언제나 달달 커피와 사탕이 가득 있어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며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었고, 택시회사 식당엔 늘 날 예뻐해 주는 아주머니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주전부리를 챙겨 주셨으며, 무엇보다 춥거나 덥거나 비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 등굣길에 오를 때 아빠의 동료인 택시 아저씨들이 너도나도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가위바위보까지 하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운전기사를 둔 공주님처럼 택시 뒷좌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며 등교하는 호사 누리곤 했는데 그 당시엔 몰랐다. 나에겐 행복한 짧은 등굣길이었지만 출근하시는 아저씨들에게는 긴 근무 시간의 연장이었음을.
특이하고도 따스했던 그 집에서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까지 살았다. 반지하, 주유소집에 이어 살게 된 우리 가족의 세 번째 집은 마당있는 2층 양옥집의 지하였다. 양옥집의 주인은 바로 고모네였는데 고모네는 식구가 엄청 많았다. 우리 언니와 동갑내기 언니와 그 위로 고등학생인 사촌 언니들 4명과 사촌오빠도 1명 있었다. 우린 고모네 집 지하로 이사했다. 그 집의 구조는 무척 특이했다. 길에서 지나가다 바라보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과 고모네 집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고모네 차가 세워진 주차장이 일렬로 이어져 보이는 형태였다.
고모네 집 지하에 살면서도 아빠는 1시간이 넘게 걸리는 택시회사에 오토바이를 이용해 계속 출퇴근하시며 택시 운전을 하셨다.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무거운 헬멧과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한 채.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최고조로 무거웠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즈음 우리 엄마 고생문도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사하자마자 고모네 집의 모든 집안일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개봉동의 피아노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모네 집의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 설거지 등등의 집안일은 모두 다 우리 엄마의 몫이 되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청소년들이 가득한 고모네 집안일 챙기랴, 거기에 더해 우리 언니와 나까지 신경 쓰랴, 우리 엄마 손은 물이 마를 날이 없고, 몸이 편할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모네 집에선 반려견도 두 마리나 키웠다.
어린 나이임에도 난 알았다. 우리 네 가족이 고모네 집 아래에 자리 잡은 대신, 우리 엄마가 고모네 살림을 해주기로 한 것이었음을. 고모네와 우리 집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은 언니와 나에게 ‘눈칫밥’으로 전해졌다. 거의 삼시세끼를 고모네 집에서 해결했던 언니와 난 고모집을 우리집 드나들 듯했는데 고모네 문을 열 때마다 우리 엄마는 청소하거나 설거지하거나 빨래를 하고 계셨다. 청소할 때 물건을 옮겨두거나 식사를 준비할 때 식탁을 닦는 것 정도로는 ‘엄마를 도와드린다’라고 말하기에 너무너무 작은 일이었다. 그러기엔 우리 엄마가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고모는 매우 다혈질 성격으로 화가 나면 가감 없이 내지르고, 기분 좋으면 과하게 표현하는 분이셨다. 반면 조용조용하셨던 고모부는 무척 예민한 성향으로 고집이 세고 호불호가 정확했는데 무엇보다 특이했던 건 밥 빼고 모든 음식을 드시기 직전에 후추를 톡톡, 뿌려 드신다는 거였다. 두 분은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새벽시장 옷 장사를 하셨는데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려서인지 항상 신경이 날카로우셨다.
이런 고모와 고모부의 밤낮 바뀐 생활방식과 예민함은 우리 엄마를 더욱 힘들게 했다. 어려운 시댁식구인 두 분의 생활방식에 맞추어 시간분배를 잘해서 하루 세 끼 음식을 차려내야 했고, 두 분이 주무시는 낮에는 되도록 조용조용히 청소를 마쳐야 했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는 대가족을 위해 냉장고에 늘 마실 것을 준비해 놓았고, 과일은 늘 깔끔하게 바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다듬어 놓으셨다.
그뿐인가. 그 시절의 중고등학생인 사촌 언니들과 사촌오빠는 늦게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도시락을 한 개가 아닌 두 개씩 싸서 다녔어야 했다. 그 와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소풍이라도 가게 되면 그날 모든 도시락은 김밥으로 통일되었는데 소풍 시즌인 가을만 되면 엄마는 무척 자주 김밥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눈치는 물론 배려조차 없는 우리 고모는 중간중간 시장 사람들과 같이 먹겠다며 새벽 시장에 가지고 나갈 김밥 도시락 몇 개를 준비해 달라고도 했다.
사촌 언니와 오빠는 이런 배려심 없는 고모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 우리 엄마를 입으로는 숙모라고 불렀지만, 마음으로는 가정부처럼 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우리 엄마는 그저 고모네 가정부 혹은 집사였다. 고모네 집 일로 늘 바쁜 우리 엄마의 뒷모습, 주눅 든 모습들은 애처로움이나 불쌍함을 넘어 부당함, 혹은 억울함으로 아로 새겨졌다. 엄마도 언젠가 고모네 집에 살았던 그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지나치듯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고모네 집 지하에 살던 그 시간이 우리 네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다혈질 고모와는 다르게 평소에 늘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고모부는 나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이름 대신 ‘개봉동’이라고 불렀다. 난 내가 태어난 곳을 말하는 ‘개봉동’이라는 호칭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늘 어렵고 어색한 고모부에게 감히 싫다, 좋다 말씀드릴 수 있는 배짱이 내겐 없었기에 늘 나는 ‘개봉동!’이라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했다.
고모네 너른 거실 한 켠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우리 언니와 동갑내기인 수연 언니의 피아노였다. 난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수연 언니는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꼭 내가 하교 후 고모집에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 피아노 선반 뚜껑을 열고 보란 듯이 피아노를 쳤다. 단골 연주곡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선율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곡으로 어린 나이에 난 피아노학원에서 들었던 것보다, 그 곡을 듣고 피아노에 대한 매력에 순간 폭, 빠져들었다. 수연 언니처럼 피아노를 한번 쳐보고 싶었지만, 더 해보고 싶었던 건, 중간중간 발끝으로 꾹꾹 누르는 피아노 페달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얄미운 수연 언니는 받아주지 않았다. 늘 내 앞에서 땅따란땅땅따, 하고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다 치고 나면 마치 자신만 이 곡을 이 피아노로 칠 수 있다는 것처럼 빨갛고 긴 천으로 선반을 얼른 덮고 건반 뚜껑을 덮은 뒤 폭신한 피아노의자를 쑥 밀어 넣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네 피아노는 나에게 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수연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피아노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는데 난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고모와 고모부가 새벽시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안방 문을 닫고 주무시면 엄마는 모든 창문을 열고 거실 청소를 하셨다. 바로 그때 창문을 통해 한 줄기 하얀 햇살이 거실을 가로지르곤 했는데 그 순간이 어린 나에게 있어 판타지 타임이었다.
거실을 가로지른 하얀 햇살은 순간순간 투명하게 바뀌며 그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먼지도 세세하게 보여줬다. 그 먼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벽에 기댄 듯 놓여있는 하얀 레이스를 입은 진갈색 피아노가 점점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나는 가끔 양말 신은 두 발로 스케이트를 타듯 천천히 발을 밀며 피아노 곁으로 다가가 용기를 내어 건반 뚜껑을 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섬세하게.
하지만 나의 조심성과 세심함을 모른 척하듯 건반 뚜껑은 아무리 살살 열어도 특유의 ‘탁’ 소리를 내곤 했다. 가끔 깊은 잠에 들지 못한 고모부는 그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개봉도옹~’하고 주의를 주셨다. 고모부의 ‘개봉도옹~’은 어린 내 심장을 더 요동치게도, 일순간 멈추게도 했는데 그때마다 청소나 빨래를 하던 엄마가 다가와 두 눈을 찌푸리시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끔 고모와 고모부가 집에 늦게 오시는 날에는 엄마의 허락을 받고 피아노를 쳐보기도 했다. (엄마에게는 만져보기만 한다고 했지만 난 몇 번 건반을 눌러보았다...) 그때마다 진갈색 피아노의 건반은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듯 늘 빨간색 긴 천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것마저도 휙, 빼질 못하고 살며시 한 쪽 끝을 접어 ‘띵가띵가’ 몇 개 건반을 눌러보곤 다시 얼른 덮어놓았다. 소심했던 난 피아노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꼈다. 처음 도둑질을 하는 도둑의 마음이 그럴까. ‘이번 한 번만 더’, ‘이번이 마지막이야’하고 또 건반을 한 번 누르고, 또 다음엔 세 번 누르고, 또또 누르게 되는 이상한 중독성 그리고 비밀스러운 쾌감. 점점 과감해진 나는 나중에 ‘젓가락 행진곡’도 몰래 쳐보았다.
나에게도 피아노는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집에 피아노가 없는 친구들에게 손가락 연습해 오라며 만들어 나눠주신 종이 피아노. 난 피아노 가방에 종이 피아노를 애써 감추듯 둘둘 말아놓고 고모네 집에서 진짜 피아노 앞에 다가섰다. 그렇게 도둑처럼 살금살금 때론 과감하게 피아노를 치며 놀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났고 난 4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엄마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피아노 옆에 딱 붙어 선반을 누르며 소심하게 피아노학원에서 배운 곡을 연주하며 놀고 있었다. 또 건반을 손바닥 전체로 눌러보기도 하고, 검정 건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딸깍,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에서 주무시다 깬 고모였다. 그날따라 고모와 고모부가 시장에서 일찍 들어오셨는데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과감하게 피아노를 쳤던 것이다.
고모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나왔고 등 뒤로 고모부는 평소보다는 더 짜증 가득한 저음 목소리로 “개봉도옹!”하시며 등 돌아 누우셨다. 부엌에 있던 엄마는 또 얼른 나와 “아고, 너가 고모 깨웠구나. 고모, 미안해요”하셨다. 난 잔뜩 쫄았다. 고모한테 혼날 것도 두려웠지만, 평소 ‘피아노 치지 마, 고장 나면 어쩌려고 그래’하며 단도리 하셨던 엄마가 더 무서웠고 또 미안했다. 고모는 어기적어기적 다가오셨다. 그때 안방에서 고모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국민학교 졸업하면 개봉동, 너 가져가라. 알것냐.
그때 많이 쳐, 지금은 안 된다, 고모부 잠 깨우면!”
고모부 말에 고모도 말씀하셨다.
“응, 그래. 개봉동 너꺼 해라.
근데 지금은 가져가도 놓을 데가 없으니까 좀 참아, 알겠어?.”
고모와 고모부 말에 피아노 쪽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나는 듯했다. 분명 창문은 닫혀있고 커튼이 쳐져 있어 햇살이 들어올 구멍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난 더욱더 피아노를 애지중지 만지고, 닦고, 하얀 레이스 각을 잡았다.
고모, 고모, 고모, 그만.
고모와 고모부가 나에게 피아노를 가지라고 한 날 이후부터 난 생일이 되면 얼른 우리 아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이사하게 해달라고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빌었다. 그래야 우리 엄마가 일을 덜하고, 또 나도 갖고 싶은 피아노를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의 소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지만, 속으로는 이런저런 문제로 속상해하며 고모네 지하집에서 2년이나 더 살았다. 엄마는 졸업식 날을 목표로 열심히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 표현인 ‘죽을똥쌀똥’ 아끼고 아껴 우린 드디어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네 식구가 살기에는 매우 작은 평수였지만 우린 정말 기뻤다.
이사 소식을 가장 반기고 기뻐했던 건 바로, 나였다. 이사를 하면 방도 2개가 되고, 거실도 있고, 무엇보다 내 피아노를 둘 공간도 생길 테니 기대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이사를 앞둔 어느 날, 난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모네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피아노가 어느 정도 큰지 사이즈를 잴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피아노, 내 피아노~’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고모네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허전했다. 있어야 할 그곳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가 휑, 했다. TV를 보고 계시던 고모에게 내 피아노의 행방을 물었다. 고모는 TV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말씀하셨다.
”피아노? 뭔 피아노? 아, 피아노오~
그거 지연 언니네 애기 줬쟈. 이번에 지연 언니 애기 낳은 거 알제?
엊그제 고모부랑 같이 지연 언니네 갖다줘뿌리고 왔다. 애기야 갖고 놀라공.“
‘지연 언니 애기요? 이제 막 꼬물꼬물하는, 아직 앉지도 걷지도 못하는 애기한테요?
그럼, 저는요? 저는 어떻게 해요? 내 피아논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찼지만 열세 살 소녀는 아무 말도, 아무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깊은 황망함과 진한 배신감 그리고 인생 허탈함을 그때 처음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온몸으로 가장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서글픔’이었다. 고모의 말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내 모습을 우리 엄마가 절대 보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고모는 아마도 나와의 약속 자체를 기억 못 하셨으리라. 그건 고모부도 마찬가지다. 설사 나와의 약속을 아차! 하고 순간 떠올렸어도 언제나 그렇듯 아주 당연하게 무시하셨을 거다. 엄마한테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꾹 참았다. 내가 너무 속상해하면 엄마는 나보다 100배는 더 속상해하셨을 게 뻔했으니까. 어른이 된 지금도 그날 혼자 꾹 참으며 감정을 삭인 열세 살의 나를 칭찬한다.
네 번째 집인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고모네 식구 중 단 한 명도 밖으로 나와보질 않았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그 식구들 특유의 이별 인사였다는 것을. 내일 당장 아침 식사가 준비되지 않을 것에, 입고 갈 빳빳한 교복이 없을 것에, 집 안 청소도 되어있지 않을 것에 불편하고 당황해하며 가뜩이나 서로 친하지 않은 그들 사이-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 간-의 다툼이 시작될 것을 그들도 짐작했으리라. 이사를 핑계로 나는 피아노 학원을 관둬버렸다.
이사한 집은 고모네와 20여 분 떨어진 거리로 우리 식구처럼 처음 아파트에 살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린 금방 아파트에 적응했고, 우리 언니는 착실하게 공부해서 원하던 예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을 고려해 졸업 후 곧바로 회사에 취직했다. 난 언니와 달리 공부에 취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문계를 선택해 대학생이 되기를 꿈꾸며 나름 열심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보냈다. 하지만 역시나,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다. 예술대학 진학을 꿈꿨던 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재수를 결심했다. 정말 이를 악물고 1년을 잘 지내볼 심산이었다.
바로 그 무렵, 고모가 처음으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말로는 집구경이었지만, 실상은 동태 파악이었다. 우리가 고모네 집에서 나온 후로 고모네 집에는 몇 명의 가정부가 거쳐 갔는데 우리 엄마만큼 고모부의 예민한 입맛을 맞추고, 고모의 직접적인 표현을 감내하고, 오빠들의 톡 쏘는 말 한마디를 그냥 묵인할 분이 없었던 것이다. 고모의 급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나와 엄마 둘만 있던 우리 집에 살짝 긴장감이 돌았다. 난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안 돼. 고모가 다시 와서 일해달라고 하면 못한다고 해, 알았지?“
”알았어, 안 해. 엄마도 할 만큼 했어. 이제 고모네 빚진 거 없어.
더 해주면 더 해줬지, 덜 한 거 없어. 아빠랑도 말 끝냈어. 고모네 일은 안 하기로.“
확고한 엄마의 말에 난 안심이 됐다. 하지만 고모 특유의 말본새는 안심이 안 됐다. 역시나 고모는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덥다며, 선풍기를 갖고 오라며 특유의 잔소리를 시작했다.
”아니, 사람이 온다고 했으면 좀 미리 준비를 해놓을 것이지.“
”고모, 오셨어요. 우리 집은 맞바람이 잘 쳐서 한여름에도 선풍기 안 틀고 지내요.“
고모를 맞이하며 내뱉는 내 말에 스스로 놀랐다.
‘와, 나 컸나 보다. 이제 좀 컸다고 고모에게 능글맞게 말대꾸하다니!’
그냥 먹은 스무 살은 아니었나 보다. 고모는 내 말에 눈을 흘기더니 두 번째 공격에 들어갔다.
엄마가 고모에게 대접할 부추전을 부치고 있었는데 레이더망에 딱 걸린 것이다.
”요즘 누가 플라스틱 뒤집개를 써엉? 이젠 없이 사는 티 좀 내지 마러~
하나라도 제대로 된 걸 써야지, 이게 뭐여.“
아.. 말문이 막혔다. 역시나 갓 스무 살을 넘긴 아가씨에게 고모는 넘사벽인 거였을까.
엄마는 순간 흠칫, 하다 안부를 건네셨다.
”잘 지내셨어요, 형님? 고모부도 잘 계시지요. 못 뵌 지 오래됐네요.“
고모는 플라스틱 뒤집개로 만든 부추전을 맛있게 드셨다. 그러면서 엄마를 보호하듯 방패처럼 앉아있는 나를 보고 안부를 물었다. 난 대학 재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고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빠른 말로 나에게 보이지 않는 전쟁을 걸었다.
”재수? 대학을 재수 한다고야? 재수는 무슨 재수야, 철이 덜 들었고만. 네 분수를 알아, 이것아! 부모 등골 빼 먹지 말고 미용 기술이나 배워서 착실하게 돈이나 모아. 지지배가 대학 가서 뭐 하려고. 돈이나 알뜰살뜰 벌어서 시집이나 가. 참, 수연 언니 알지? 수연 언니는 지금 대학 졸업하고 착실하게 대기업 다닌다, 큰 대기업S!“
우리 언니와 같은 해 태어났지만, 3개월 일찍 태어났단 이유로 ‘언니’ 호칭을 강요했던 고모와 그 말을 듣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언니’라고 부르라고 우리 언니에게 강요했던 수연 언니. 내 앞에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했지만 혼자 있을 땐 피아노 뚜껑 한 번 열어보지 않았던 수연 언니. 그 수연 언니가 대기업에 취직했단다.
고모의 말을 들으며 난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속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식구들을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말로, 행동으로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걸까. 난 가만히 듣고 있는 엄마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다. 나도 맞장구로 포장한 말대꾸로 방어진을 구축했다.
”어머어머, 고모. 수연 언니가 대기업S 다녀요? 우리 언니도 대기업 다니는데. 종로에 있는 대기업H 본사 아시죠? 거기 홍보팀에 있다가 지난달부터 법무팀으로 옮겼잖아요. 아니, 예고에 갔는데 법무팀에서 일한대요, 글쎄. 너무 웃기죠? 맨날 야근하고 엄청 바빠요. 참, 수연 언니는 대기업S 무슨 팀에서 일하는데요? 인사팀? 아니면 우리 언니처럼 법무팀인가? 언제 한번 놀러 가서 밥 사달라고 해야겠네, 고모.“
고모는 순간 당황하셨다. 그리고 우리 언니가 진짜 본사에 다니냐고 되물었다. 난 기다렸다는 듯 우리 언니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확인 사살을 했다. 요즘 대기업 하청업체나 일용직 다니는 사람들도 밖에 나가서는 대기업 다닌다고 하지만 우리 언니는 아니라고, 진짜 대기업 본사에 다닌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모는 눈빛이 흔들렸다.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수연 언니가 S콜센터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난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터져 나올 듯한 내 심장 소리에 내가 놀랄 판이었다. 난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침착하게 능글맞은 애교로 마무리했다.
”근데, 고모. 우리 집 구경하러 오셨으면서 음료수도 하나 안 사 오신거에요? 에이, 설마. 휴지를 사 오셨을까나~ 잉, 없네? 모에요, 고모. 개봉동 서운하게.“
엄마가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역시나 고모는 고모였다.
”아니 동생네 오는 데 뭘 사 오냐, 사 오긴. 오늘은 바빠서 그냥 왔다.“
나의 방어와 공격에도 고모는 특유의 일관된 톤의 갑질 고삐를 풀지 않았다.
역시나 금방 새로운 화살을 장전했다.
”느그 아빠는 아직도 새벽에 오토바이 타고 택시 운전 다니냐잉.
나이가 들면 좀 일도 몸으로 하는 거 말고 머리로 하는 걸 해야 편할 텐데.
청년 때는 일본 유학도 갔다 오고, 공부도 잘하던 게 왜 이렇게 사나 물러~
나이를 먹으면 먹는 대로 좀 형편이 나아져야지 이게 뭐냐, 집이. 마누라라도 잘 만났으면...“
이제 공격의 방향이 틀어졌다.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말없이 물만 들이키셨다.
나도 입이 바싹 말랐지만 물 마시긴 싫었다.
”그러게요, 고모. 아빠는 참 운이 없어. 돈만 좀 있었으면 더 공부해서 박사나 교수 했을지도 모르는데. 왜 친할머니는 큰아빠랑 고모만 도와주고 우리 아빠는 안 도와주셨데요?
우리 아빠 막내라고 엄청 예뻐하셨다면서 왜 그러셨대, 진짜~“
품고 있던 비장의 카드를 날렸다. 엄마는 내 바로 옆에서 얼음이 되셨다. 막내딸의 이런 멘트는 생각지도 못하셨을 거다. 난 잘 알지도 못하는, 그저 어깨 너머로 살짝 들었던 그간의 어른들 간 대화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분석해 카드를 날려본 거였다. 아님, 말고 식으로. 고모는 당황했다. 친할머니가 도와주긴 뭘 도와줬냐며 말끝을 흐렸다. 고모의 모습에 확신했다. 우리 아빠만 소외된 그들만의 뭔가가 있긴 있었다는 것을.
고모는 집을 나서면서까지 우리 집을 마뜩잖게 생각하고 그것을 콕콕 후비듯 표현하셨다. 벽지도 싸구려, 신발장도 싸구려, 현관문 색깔도 촌스럽다, 버릴 건 버리고 살아라, 거지 같은 건 사지도 말고 하나라도 제대로 된 걸 사라 하셨다. 그렇게 내가 성인이 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모와의 대면이 끝났다.
* * *
갑질러의 선물
그날 이후로 나는 고모를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벌써 마흔 살이 훌쩍 넘었으니 20년 넘게 못 본 셈이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시간이 약이 되고, 세월이 흐르면 변한다’고. 하지만 나에게 시간은 약이 되지 않았다. 열세 살, 그날 이후로 어디에서든 진갈색 피아노만 보면 그 당시의 서글픔이 묵직하고 끈적하게 올라와 목 안이 뜨거워진다. 세월이 흘러서도 고모는 변하지 않았다. 한두 번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수화기 너머서 들리는 그 특유의 걱정을 가장한 무시무시한 무시의 언어와 억양들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고모’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라고 한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인생의 첫 갑질러’.
고모가 변할 거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 고모네 식구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딱 한 번 밝은 희망을 품었고, 스무 살이었던 나는 내 방식대로 건강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내 아이들이 내 앞에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친다. 그 옛날 수연 언니가 치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어린 내 모습과 한줄기 하얀 햇살 위로 둥둥 떠다니던 먼지와 함께 그 시절 진한 갈색 피아노 한 대가 겹쳐 보인다. 서글픔을 처음 맛보았던 그 때, 나의 갑질러는 나에게 큰 선물을 준 것 같기도 하다.
소중함의 소중함,
간절함의 간절함이 줄 수 있는 짙은 여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