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3
타협하지 않는 글쓰기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신나리
*이번 글은 '원고'에서는 거의 처음 써보는 주제인데요. 그냥 쓰지 말까, 몇번을 망설였습니다. 다소 길지만 끝까지 읽고,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정말 좋겠어요. 공감이 아니라 반론도 환영합니다. 심야메일 커뮤니티에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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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을 읽고 독자들은 솔직하고 용기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말은 칭찬이지만, 들을 때마다 찝찝하기도 했다. 어디까지 써야 솔직한 걸까. 무엇이 솔직한 걸까. 내가 사소한 일에도 얼마나 쉽게 분노하는 인간인지, 매일 밤 참지 못해 라면을 끓이고 술을 마시고 마는지, 나와 다른 타인을 얼마나 꼴 보기 싫어하는지 쓰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못난 점을 까발리는 게 뭐 어때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양상으로 모순과 복잡함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내가 고백하는 치부는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하는 범죄도 아니고, 금기 행동도 아니지 않던가.
내가 느낀 깨름칙함,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찝찝함은 이것이었다. 나의 경험이나 사고방식을 마치 누구나 겪는 것처럼 쓰고 있지는 않았던가. 내가 서 있는 조건이나 위치를 은근히 가리지 않았던가. 내 조건을 드러내면 ‘너는 그런 걸 가지고 있으니 그렇겠지’라는 말을 들을까 봐, 보편성에 호소할 만한 부분만 일부러 부각하진 않았던가.
아이를 낳고 키우던 경험을 글로 쓸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득하기 위해 남편은 늦게 퇴근하고 양가 부모님들은 멀리서 산다는 사실을 거듭 언급하곤 했다. 직장에 다닐 수 없던 현실을 말할 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출퇴근과 급여의 조건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부각시키곤 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나는 소위 대기업이라 불리는 곳에서 10년의 근무 경력이 있었고,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직업군에 속했다. 내가 집에서 아이를 전적으로 맡을 수 있던 건, 남편 혼자 안정된 벌이를 해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조건이라고 해도 일은 힘겹고, 육아의 무게가 대단히 감소하진 않는다. 그러나 ‘유리하게 보이는’ 조건들이 나의 ‘불행함’을 행여 감소시키기라도 할까 봐,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힘든 이유’를 샅샅이 찾아내며 글을 쓰곤 했다.
아이가 자라며 버거운 역할을 하나씩 벗어던지는 선택을 해나갔다. 남편의 육아휴직을 밀어붙였고, 내 일을 다시 시작했으며, 이혼을 불사하고 가사와 육아 분담을 위해 싸워나갔고,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을 포기했다. 그러자 여성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으로 나의 경험을 말하던 이전과 달리, 더 이상 전형적인 해석으로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엔 나의 선택을 누구나 납득 가능한 당위로 설명하려 했다. 평등한 부부 관계를 구축해야 하니까, 엄마로서 아이와 분리되어야 하니까, 자신을 희생하는 건 억압적이니까. 그러나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했다. ‘82년생 김지영’의 서사가 아니라, 좀 더 좁고 자세한 위치를 들여다보아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은 이렇다. ‘나는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가?’ 이런 물음엔 성격유형검사에서부터 프로이트의 가족 드라마, 내면 아이, 심리학적 트라우마 가설이 뒤따라오지만, 이 글에선 대중적인 심리학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보다 내가 처했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낯설게 바라보려 한다. 직장을 가진 나, 여성인 나, 이성애자인 나, 수도권 변두리에 사는 나,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이너의 세계 속에 있던 나.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독특성으로 가지게 되었는지를 진술해 본다.
‘정치적 올바름’이 강박에 가깝게 요구받는 시대에서, 조건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누구도 상처 주지 않으려는 ‘면피’로 작동할 우려도 있다. 다른 위치의 사람들을 두루두루 언급하느라고 ‘옳은말 대잔치’나, ‘진보적인 인간이 된 듯한’ 기분만 맛보는 힐링 글이 되기란 너무 쉽다. 그래서 나는 무해한 글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의 편견과 한계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지향한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결국 나를 설명한답시고 나를 규정짓는 건 아니냐는 것. 그러나 내가 가진 ‘자원’이나 ‘자본’, ‘배경’을 보는 것은 정체성을 고정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나의 직업적 특성이 여성성의 규범과 충돌하면서 무엇이 만들어졌는지를 풀어내는 건, 나를 결정한 조건을 설명해 주는 일만이 아니다. 그보다 나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새로이 만들어 갈 수 있는지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사회가 고정하려는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시도다. 다소 막연하겠지만 하나씩 접근해 보겠다.
이번 글에선 조한혜정의 <글 읽기와 삶 읽기 2>와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텍스트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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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2>
<글 읽기와 삶 읽기 2>가 출간된 건 1994년. 무려 30년 전이다. 여전히 탈식민주의 연구와 글쓰기의 기본서로 추천되는 책이다. 이 책의 큰 주제는 “중심을 상대화”하기다. 중심이란 하나는 서구이고 하나는 남성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저자가 강단에서 책을 썼던 90년대, 지식인들은 중심이라는 서구를 선망하고 동경하며 주류에 들지 못한다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저자는 서구로부터 이식된 이론이나 개념에 꿰맞추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우리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글을 쓰자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저자는 여성이 남성이라는 중심을 버리고, 여성이라는 주변성을 잠재성으로 만들어 가는 글쓰기를 하자고 한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룰 건 두 번째 주제다. 책에서 저자는 명예 남성(남성 중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한 여성)으로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고 여성으로서 위치를 새로이 자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여성들과 함께 “굳어진 혀를 푸는 말”을 하고 기록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저자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한다. 책을 기획하고 필자들을 찾고 모임과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여자들은 신음소리만 내고 있다고. 글쓰기 훈련이나 공부가 부족한 것만이 원인도 아니었다. 몇 년씩 공들여 토론하고 가르친 여학생들도 비슷했다. 글쓰기가 한풀이나 하소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나 피해받았는지 증명하거나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미화시키기에 바빴다고, 저자는 뼈아프게 비판한다.
90년대엔 지금보다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매우 부족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뜨끔했다. 앞서 썼듯이, 나도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을 적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지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나 자신을 거리 두며 바라보겠다고 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선 달콤하고 축축한 자기 연민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경력 단절이라는 상황에서도 비슷했다. 경력 단절이 될 수 밖에 없던 사회적 구조적 원인을 충분히 파악했지만, 여기에서 어떻게 무엇을 할까 탐구하기보다, ‘이런 이유로 내가 못 하는 거야. 일해봤자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는 건데 뭐.’라는 합리화의 유혹에 빠져들어 갔다.
이건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의 조건을 파악하고 나니, ‘아, 그도 자본주의 구조 때문에 육아를 못 하는구나!’라고 이상하게 안도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솟곤 했다. 억압 기제를 파악하는 일이 억압에 안착해 버릴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하고 논리적인 구실이 되어 주었다. ‘사회가 이 모양인데 어쩌겠어.’
조한혜정은 억압된 주체가 해방을 원할 때 거치는 일반적 과정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는 여러 권력 장치를 통해 여성을 지배하지만, 여성은 지배를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다소 구닥다리가 되긴 했지만,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명제를 보자. 세상은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로 치켜 세워주므로 그 말이 억압 기제의 하나라는 걸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그러다 당사자가 자의식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전제를 의심하게 된다. ‘왜 엄마만 키워야 해?’
이 단계에서 중요한 건 지배 구조를 ‘상대화’하여 보는 일이다. 당연하게 보지 말고 낯설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엄마가 아이를 몇 년 동안 직장도 포기하고 돌보는 일이, 어떤 시대에 특수하게 만들어진 양육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진리도 아니고 도달할 목표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 납득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한풀이를 반복하게 된다.
이 말이 무엇이냐. ‘왜 엄마가 키워야 하나요’라고 질문까지 하긴 했지만, 여전히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만 한다는 대전제가 마음에 박혀 있는 한, 하소연과 투덜거림만 반복한다. 집에서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얼마나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만 토로하는데 그친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고 남들이 자신을 비난할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왜 엄마가 키워야만 하나요!’의 속뜻은 ‘저 좀 알아봐 주세요!’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선 억압되던 주체는 중심을 상대화하는 것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심’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나 준거집단, 규범을 더 옳고 도덕적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건 당장은 후련해지지만, 구체적 일상이 절로 달라지진 않는다. “의식이 바뀐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 ‘모성애 이데올로기’라는 걸 알아차리고 ‘나를 먼저 챙기는 엄마’가 되자며 여러 가지 일을 벌여보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원래의 자리로 슬며시 기어들어가 억압의 안온함에 젖는 경험, 해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삶을 바꾸기 위해선 “자신이 선 자리를 명확히 인식”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어디 멀리 가려 하지 말고, ‘내가 선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기 삶을 변화시켜 가는 예로 식민지 조선 시대, 남편이 일찍 죽자, 일부종사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해 버렸던 자기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과부라는 부당한 위치에서 박탈감에 젖어있기보다 자기 위치를 새롭게 규정해 나갔다. 그들은 ‘왜 일부종사해야 하나요!’라고 절규하기보다 관습을 버렸다. 현대적인 버전으로 풀어보자면 남편이 자기 생일을 기억해 주는 걸로 존재 가치를 가늠하던 여성이, 어느 날부터 자기 생일상을 직접 차리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버전으로 서울로 올라가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지방대 교수들이, 상경을 포기하고 자기 학생들과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 있다.
자기가 선 자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찾아가는가? 저자는 억눌려 있던 기억에서 “혁신성의 바탕”이 될 원천을 찾아내라고 한다. 규범에 순응하거나 교정되기 전의 손상되지 않던 경험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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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답지 못하다는
수치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부터 나를 새로이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예시로 내가 ‘여자가 되어온 과정’을 써보겠다.
나에겐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건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것, 남자에게 적극적 구애를 받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슨 조선시대 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상식’이 되기 전, 2000년대에 내가 겪던 열등감이었다. ‘왜 남자들은 나를 무서워할까! 왜 나는 애교를 떨지 못할까! 나도 사랑받는 여자가 되고 싶은데!’ 여기에서 이 콤플렉스를 새롭게 써보기로 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 어른들을 떠올리고, 권위적인 가부장이 내 주변에 없었음을 새롭게(!) 발견한다. 아버지는 야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운전하다 도롯가에 코스모스가 피어있으면 멈춰 내려 사진을 찍고, 드라마를 보면서 툭하면 울던 사람이었다. 집안의 다른 남자들도 비슷했다. 그들도 당연히 남자 대접을 원했고 때론 폭력을 휘둘렀으나, 그 힘이 여자들을 길들이고 굴복시키는 데까지 가진 못했다. 한편 여자들은 ‘기가 셌다.’ 나는 남자들의 영향력을 무서워하기보다 무시하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남녀공학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쳐 왔지만, 청춘시절, 남자라는 종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고등학교는 시에서 가장 공부 잘한다는 여자애들이 모인 곳이었고, 여자애들이 학교 분위기를 압도했다. 대학에서 내가 택한 전공도, 회사에서의 조직도 ‘여초’였다. 이럴 경우 소수의 남자가 여자들을 택하는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는데, 내가 있던 곳에선 남자들이 ‘언니’가 되었다. 이러한 성장환경에선 우에노 지즈코가 쓴 대로 “아이에서 여자로 되어갈 때, 남자가 필요 없었다.”
보통 여성들이 20대에 사회화를 겪으며 길든다면, 나는 매우 운이 좋게도(?), 대부분의 여성이 억지로라도 익혀야만 했던 관계 지향적이고, 타인에게 맞춰주는 태도를 습득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속한 직업군에선 직설적이며 간결하고 명확한 언어가 필요했고, 말이나 표정, 외모, 태도보다 보이는 한 장의 결과물이 거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명예 남성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남자로서 존재감이 없었으니까 그들을 따라할 필요도 없었고, 남성 중심적이며 권위적인 태도는 인정받지 못했다. 가끔 상냥하지 못한 나의 태도를 불편하다며 지적한 남자들이 있었지만, 업무 성과가 여성스럽지 못함을 커버해 줬다.
문제는 직업과 공부를 벗어난 데서 발생했다. 20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연애/결혼 시장의 가판대에 올려지며 여자로서 나의 ‘상품 가치’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남자를 ‘남자로 대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허세 부릴 때, 맞장구 치거나 방긋이 웃어주기는커녕 어리둥절하거나 띠꺼워하는 태도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협박도 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들이 알아서 피했다. 그때 나 자신을 파악해야 했는데, ‘사랑받는 여자들, 남자에게 구애를 끌어내는 여자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결혼도 하고 싶었다.
노력했다. 맨스플레인을 해도 웃어주고,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웨이브 긴 머리도 해보았다. 다 실패. 그러다 우연히 마초성 없는 순진한 남자를 만났고, 그를 꼬드겨(?) 결혼에 골인했다. 바야흐로 못다 이룬 꿈을 펼칠 때다. 나는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이는 연애에 세뇌당한 세대였다. 내가 속한 고학력 중간 계급에서는 기사도 정신과 경제력을 갖춘 남편과 애교와 교양 있는 아내가, 서로의 정서와 감정 교류를 온갖 로맨스 의례를 통해 충족해 나가는 것이 모범답안처럼 보였다. 매우 좋아 보였으므로 따라 하려 했다.
잘 되었겠는가? 모조리 삐걱거렸다. 가랑이 찢어질 것 같아 죄다 그만두고서야, 놀라운 사실을 만났다. 사랑 가득한 부부관계나 화목함을 위한 노력을 그만두면 외로움에 몸을 떨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너무나 편했다. 그제야 알았다. 이게 나였다는 걸. 애초에 여성스러움을 자원화하여 남자에게 든든하게 보호받거나 혜택과 재미를 본 적은 내게 없었다. 그러니 그만둬봤자 잃을 게 없었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런 거에 목맨 거야?’
남편? 평생을 억척스럽게 일해 온 어머니 밑에서 적당히 방치되며 자랐고, 여자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남자였다. 결국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여자가 ‘남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감정 노동을 비롯, 일체의 성애화된 돌봄을 그만뒀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 하우스메이트처럼 살아간다. 아이와 ‘잘 놀아주는’ 아빠, 아이를 ‘보살피는’ 엄마라는 성역할 구분 없이 각자 자기만의 스타일대로 ‘둘 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돌본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로서 나의 역할극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 짧게 재구성한 글이다. 규범에 순응하려 했으나, 결국 내 기질대로 거침없이 밀고 갈 수 있던 배경을 찾아보았다. 이전까지 이런 과거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충분히 독립적이지만 남자에겐 사랑받는 여자가 돼라’는 21세기적 규범에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여자로 인정받는’ 중심으로 가고자 했을 때, 남자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성격이나 살갑지 않은 태도는 문제점이자 결핍이었다. 예쁘지 않아서, 애교가 없어서, 싹싹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며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심을 버리자, 결핍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발견 할 ‘틈새’가 생겼다. 디디에 에리봉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언급했듯, ‘해묵은 수치’가 ‘새로운 자긍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엔 여자답지 못해 창피하거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많은 점이 현실을 바꿔나갈 힘으로 ‘재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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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글이 길어지지만,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본래 가진 계급적 특성과 사회적 계층 상승으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취향 사이의 간극을 잔인하고도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에리봉은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노동 계층에서 프랑스 최고 지식인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출신 계급을 어떻게 외면하고 멸시해 왔는지 낱낱이 증언한다. 그리고 자신이 몸에 새겨져 있던 노동 계급의 특징을 인정하며,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나간다.
나는 에리봉만큼 드라마틱한 계층 이동은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문화의 불모지도 아니었다. ‘외벌이 초등학교 평교사’ 생활을 오래 했던 아빠를 두었기에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빠는 퇴직하고 오랜 꿈이던 그림을 다시 배워 동네 ‘수채화 선생’이 되었다. 엄마는 남동생과 나를 다 키우고 나서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진학해 글쓰기를 배우고 지역 내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많은 간섭과 통제를 받으며 자랐지만, 공부하라는 소리는 거의 듣지 않았다. 그 틈에서 문학, 영화, 음악, 미술 같은 예술을 흡수해 나갔다. 예술대에 진학했을 때도 위화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취업하자 지방 소도시에서 나와 부모가 누리던 교양과 안목은 어쩐지 부족하고 촌스러운 감성이 되었다. 에리봉이 자신이 속한 지식인 계층의 허위를 비웃으면서도 자신이 갖추지 못한 것에 열등감에 시달렸듯이, 나도 비슷했다. 과거를 감추고 싶었다.
앞서 내가 썼던 조직의 다른 측면은 이랬다. 얼마 전 출간한, <이상하고 쓸모없고 행복한 열정>에서 다소 비꼬듯이 서술한 바 있다. 내가 다닌 회사들은, ‘교양 있는 한국어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서울 토박이 쁘티부르주아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집약해 보여주는 곳이었다. 유행하는 전시나 공연은 다 보러 다니고, 휴가철이면 뉴욕이나 파리로 당연한 듯이 여행을 다녔다. 30만 원짜리 월세 살 망정 자가용은 아우디를 끌었다. 몸에는 최소한 준명품 브랜드를 착용하고 전자기기는 애플로만 갖췄다. 초등학교부터 중, 고, 대, 대학원까지 한 줄로 연결된 학연이 있었다.
내가 들어간 세계는 그들 특유의 주류 의식으로 서민계급의 소박하고 투박한 취향을 무시하곤 했다. 그들의 문화라고 해서 깊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면 그들도 애초에 문화적 상류층은 아니었으니까. 조한혜정이 미국 유학을 가서 접한 풍경처럼, 본토 학생들은 세계문학을 읽지 않고 클래식을 듣지 않는다. 주류의 허술함이랄까. 나는 그동안 연마해 온 인문, 예술적 지식과 직업적 능력으로 꽤 수월하게 그 세계에 섞여 들어갔다.
그럼에도 그 세계는 내 것이 되지 못했다. 표면적 이유는 지독한 경쟁에 부적응해서였지만, 실상 서걱거리는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다. 그때 흡수한 문화적, 기술적 자원과 안목 덕에 육아를 하면서도 일을 할 수 있었다. 또 나는 효율을 추구하고 목표를 실현하는데 오래 단련된 몸이었다. 이런 능력은 아이를 돌볼 땐 분명한 단점이고, 요즘 추구되는 돌봄의 가치와 상극일지 모른다. 그러나 배우자가 버는 돈이라는 울타리에 만족하지 않고 나의 일을 찾아가는 동력이기도 했다.
에리봉은 <구별짓기>를 쓴 부르디외를 언급하며 “부르디외는 지식인 세계를 온몸으로 거부한 동시에, 벗어나지 않길 열망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양가성 때문에 부르디외는 지금의 부르디외가 된 것이라고. 나에게도 이런 양가성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으로 경쟁을 추구하는 면과 함께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또는 강남, 성수동, 판교와 같은 화려한 도심으로 진출해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과, 번지르르한 브랜드로 치장된 그 세계의 허위와 허영을 경멸하는 마음이 양립한다.
인간은 원래 모순된 존재라고? 그러나 자기모순을 들여다보는 차원에 머무는 건,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메이저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나를 팔려고 노력하면 될 텐데, 그러기엔 세속적이라고 거부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흘겨보며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비판의식을 지닌 나에게만 만족하고 있는 거 아닌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어쩌면 정말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기도 하다. 중심을 향한 선망, 포기하기로 한다. 서울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며 신세를 한탄하던 지방대 교수가 서울을 포기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활동을 택하는 것처럼. 나도 경기도 변두리에서, 지역사회와 작은 예산으로 촉박하게 뚝딱뚝딱 일하는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환경과 조건은 한계도 매우 많고, 나는 여전히 투덜거리고 있지만, 다양한 실험의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긍지가 될 수 있다. 나의 결핍만 들여다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자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그래서 조한혜정이 말했듯, “적절하게 힘이 있는 주변인”이 되기. 이 글을 쓰면서 재발명된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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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이 말한 자기 발명으로서 ‘자기 기술’, 조한혜정이 말한 주변성을 창조로 만들어 가는 ‘자기 진술’. 나도 간략히 써보았다.
풀어보자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글쓰기다. 나의 출신 배경, 성별, 건강, 학력, 경제력, 교양 등, 지금 나를 형성한 조건 속에서 무엇을 겪었고, 무엇으로부터 억압받았고, 공모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소외를 겪었는지 밝힌다.
우리는 어쩌다 운이 좋아 주류나 중심에 들어갔더라도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은 자신이 가장 약점이라고 생각해 온, 결핍과 주변성에서 나온다. 소외되어 본 경험에서 나온다. 엘리트 집안 출신인 조한혜정 교수가 자신이 ‘식민지’ 지식인이자 여자였다는 각성을 하고 이 책을 쓴 것처럼. 프랑스 최고 학벌을 섭렵했지만,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게 그토록 억울했던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를 쓴 것처럼. 우주 최고로 똑똑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으로 <젠더 트러블>을 써 페미니즘 역사를 뒤집어 버린 것처럼.
너무 멀게 느껴지는가. 학자가 되자는 말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의 여성스럽지 못함이 이성애 제도를, 낭만적 관계를, 중산층 부부관계에서 요구되는 친밀성을 ‘뜨악하게’ 바라보게 해주었고, 나만의 가족 되기를 추구하게 했다. 업계에서 메이저에 속해 보았지만 계층적 차이에서 온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경험, 그러나 거기에서 습득한 자원이, ‘변두리’에서 내 일을 새롭게 만들어 갈 가능성을 줬다.
내가 선 자리를 들여다보며, 내가 가진 주변성을 “변혁의 잠재성”으로 전환하는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내가 변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중심을 질투하고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며 자신을 소외시키던 일을 멈추게 된다.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나는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지를 모색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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