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공간
도서관은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연의 공간이기도 하다.
<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구엘, 세종, 2011,173쪽
오늘 대출자의 도서관 아침 나들이는 산뜻하다. 목요일은 책이 되어준 나무에 감사해야지. 집에 빌려 놓은 책도, 반납이 밀린 책도 없다. 지갑을 들고 가지 않아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해 주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도서관 입구 자동문이 쓱 열리고 눈앞에 펼쳐진 책들의 다소곳한 행렬을 보는 순간, 어떤 미지의 평온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 입장한다.
무질서한 도서관 밖 세상에서는 그토록 원칙을 찾으려 했건만, 십진 분류로 정리가 완벽한 곳에서 난 정처 없이 미로에 갇힌 듯 의도적으로 헤맨다. 도서관의 미로 안에서는 아리아드네의 실 (사랑에 빠진 공주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테세우스가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건네준 실타래 (나무위키참조)) 따위는 필요치 않다. 이보다 안전한 미로는 없으니까. 도서관에서는 의도적 혼란을 만끽하며 필연 같은 우연을 기대한다. 신이 내게 보내는 신탁처럼 책을 손에 쥔다. 만화책 『도서관의 주인』에서 어린이 도서관 사서 미코시바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책을 고르는 게 아냐, 책이 당신을 선택한 거지”
가끔 신도 실수를 하나보다. 신탁이 잘못 내려와 이상한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 선택에 있어 실패와 우연을 즐기는 편이다. 아무도 대출해가지 않는 책이 궁금하고 그런 책을 알 수만 있다면 제일 먼저 읽어보고 싶다. 너무 얇은 책이라서, 표지가 예뻐서, 만듦새가 독특해서, 너무 낡은 책이라서, 표지에 제목이 없어서, 너무 두꺼운 책이라서, 제목이 특이해서, 저자 이력이 독특해서, 처음 보는 출판사 책이라서, 이 책 저 책 들춰본다. 읽고 후회할 책을, 인생 책을 ‘우연히’ 만나고 싶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나만이 쓸 수 있는 언어로 답을 채워가듯 ‘어렵게’ 만나고 싶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알고리즘 신’ 덕분에 나만의 독특한 취향을 만들기 위한 수고로움이 필요 없는 요즘, 우연히 책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시간 아까운 짓일지도 모른다. 책도 돈을 벌어다 줘야 읽는 시대, 무용한 것을 무용한 그대로 즐길 줄 모른다. 누군가의 취향이 멋져 보이는 것은 그가 그 취향을 가지기까지 축적된 시행착오의 역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책이 모두 좋았다는 말보다, 읽다 만 책들과 신랄한 비판이 섞인 책의 나열이 이어질 때 그의 책 소개가 재미나고 신뢰가 간다.
불편하고 낯선 책들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페터 비에리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소설 속에서 삶의 감독은 우연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연을 즐길 줄 아는 자가 삶을 즐긴다. 독서는 책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읽다 만 책들도 완독한 책만큼 많아야 한다. 그건 책 읽기에 실패한 것이 아니며 나의 문해력이 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저런 음악을 듣다 내 취향이 아닌 음악을 중간에 그만 듣는 것과 같을 뿐이다. 전율이 돋는 도입부를 반복해서 듣듯이 감탄스러운 책의 서문만 읽어도 된다. 그러려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때처럼 이 책 저 책 자주 많이 마주쳐야 한다. 다수의 취향에 기대기보다 나만의 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를 더 즐긴다면 ‘추천’에 목매지 않게 된다. 그게 비단 독서 취향 만들기에만 해당되겠는가. 삶의 모든 면이 그러하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약간의 도파민이 내 몸에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엄숙한 도서관에서 세로토닌이 돌면 정신없이 물갈퀴를 휘저으며 우아한 척 움직이는 백조가 된다. 살짝 지루하고 지쳐 보이는 사서의 얼굴을 지나 신간도서 코너 알록달록 책등에 써진 제목들을 빠르게 스캔한다. 어머! 이게 들어왔네, 사서님 센스 있네! 신간도 아닌데 신착 코너에 있는, 며칠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보고 빌려봐야지 했던 그 책. 그냥 돌아설 수가 없다. ‘너를 위해 내가 여기 있는 거야’라는 속삭임에 벌써 손에 두 권이 들려있다. 그런데 여기 도서관 북 큐레이션 좀 보게, 혹시 그럼 이 책도 있으려나? 검색만 해보자. 이런, 웬일이야! 이 책을 아무도 안 빌려 갔네. 이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잠깐 사이에 누가 빌려 갈까 싶어 빨리 청구 기호를 출력하고 찾아간다. 날 기다리는 책을 찾아가는 길, 이렇게 설레어도 되는가 싶게 발이 재빠르다.(하지만 침착하고도 우아한 몸가짐 유지 중)
다섯 권을 손에 들고도, 혹시나 내 눈에 띄고 싶은 책이 있진 않을까, 언니 여기는 너무 춥고 외로워요,라며 외치는 책이 있지 않을까,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책등을 훑어본다. 바로 아래 칸을 흘깃 봤는데, 역시나 집에 데리고 가야 할 녀석이 있다. 보고 싶었던 책들이 딱딱 눈에 들어오는 날, 이게 바로 대출의 기쁨이지! 일곱 권 대출하고, 사서에게 마지막 말을 침착하고도 고상한 말투로 남기고 나온다.
“3주로 연장해 주세요.”
도서관에서 단 한 권을 빌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두 권 이상 대출하다 보면 책상에 금세 ‘책탑’이 쌓인다. 오늘은 반납만 하고 와야지 굳게 다짐해도, 열람실에 들어가자마자 손에 쥐어진 한 권. 아무리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독해지지가 않는다. 아니 책 읽고 싶은 감정을 눌러야 하는 게 맞는가? 이성적으로 이건 아니야, 싶다가도 집에 열 권이나 있는데 언제 읽으려고? 난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책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적 허영심이 탐욕스러운 독서가와 상습 연체자이자 게으른 독서가를 동시에 만든다. ‘대출 지름신’이 내린 며칠 사이에 ‘12층 책탑’을 쌓았다. 욕심과 다르게 게으른 독서력으로 과연 이 책들을 기한 내 읽을 수 있을지 불안과 의심의 눈초리로 책들을 한참 째려본다. 빌려온 책을 쭉 세워놓고, 책을 풍족하게 구입한 자처럼 마음이 든든했다가 반납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대출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처럼 초조해진다. (다행히 우리 지역 도서관은 반납 연체료가 없다. 난 정말 운이 좋다.)
오래 두고 볼 책이나 두꺼운 책은 일부러 사는 편인데, 이상하게 구입한 책을 더 안 읽는다. 사놓고 몇 달이고 방치한다. 심지어 책을 사놓고 정작 난 읽지 않고, 새 책을 남에게 빌려준 적도 있다. 너무나 사고 싶은 책들이었지만 막상 하루 만에 책이 도착해도 읽지 않는다. 늘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밀린다.
도서관 책들은 내게 임시로 머무는 존재다. 반납 날짜까지만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영원히 내 책도 될 수 없다.(이건 마치 밀당하는 관계에서 느껴지는 마음 같다) ‘필연처럼’ 내 눈에 띄어 손에 들린 책들인데 읽어주지 않으면 섭섭할 것이다. 나 또한 빌려놓고 읽지 못한 책을 볼 때마다 아쉽고,. 이 책을 정말 재미나게 읽어줄 다른 대출자에게도 송구스럽다. 읽지도 않을 것 같으면, 이렇게 변심할 것 같으면 반납이나 빨리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산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무한의 시간에 놓여있다. 구입할 당시에는 재고가 한정된 물건처럼 빠르게 주문해놓고, 깔끔하게 빠진 책 표지와 저자 이력 정도 보다 무심하게 책장 한구석에 놓는다. 일단 내 집에 들어온 이상 자기 발로 나갈 일 없는 물건을 둔 주인의 거드름이다. ‘나중에’ 읽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에 속아 책들 사이에 꽉 낀 채 3년 동안 침묵하고 있는 책들이 저기서 나를 째려보고 있다.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책탑을 쌓아놓은 책들을 ‘동시다발 리딩’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여러 권 빌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문어발식 독서를 하려면 여러 권이 필요하다. 호기심이 많고, 집중력은 굵고 짧아, 빨리 이해하는 편이지만 쉽게 싫증 내는 독서가인 나는 하루에도 여러 권의 책을 본다. 어떤 책은 목차를 보자마자 당장 끌리는 중간 챕터부터 읽는다. 어느 정도 읽다 보면 그 책이 주는 느낌과 정보에 질려 가는데, 그때 다른 책이 보고 싶은 욕구가 밀려온다.
이런 독서 패턴에도 나름의 균형점을 이르게 하는 법이 있는데 바로 같은 분야를 겹치지 않게 읽는 것이다. 두 소설을 동시에 읽지는 않는다. 인문사회 분야 하나, 그림책 하나, 시집 하나 식으로 구성한다. 이런 독서 방식이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나 통찰을 준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의식해서 더 난장판으로 읽는다.
무의식의 흐름대로 잡힌 책들이 서로 찰떡궁합이 될 때 ‘동시다발 리딩’의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특히 상반된 언어의 조합이 만들어지거나, 한 소설에서 느꼈던 주제의식이나 감정을 비문학에서 쓰인 용어로 대체할 수 있게 되거나, 한 사회학 책 주제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그림책이 연결되는 순간! 나만 혼자 신나는, 신기한, 신박한, 신비로운 전율이 느껴지는 즐거움이다. ‘책의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A, B, C의 책이 모두 다른 성격의 책이어도 공통된 부분이 찾아진다.
3~4권의 책을 저글링 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책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욕심쟁이 독서가다. 이런 나를 강하게 비판하는 분이 나타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님, 셰익스피어도 이 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르네상스 최초의 인문주의자이시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네 정신은 계속 이 책 저 책에 치여 쉴 틈이 없고, 머릿속엔 이런저런 주제가 가득하겠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책을 읽는 사람은 지식을 얻기도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 미쳐 버리는 사람도 있다네. 소화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이 삼켰을 때는 위나 정신이나 마찬가지야. 토하면 배가 고프기보다는 아프게 마련이지.”
위와 정신이 가끔 아플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유튜브와 넷플릭스 시대다. 책이 너무 많아 미쳐버리기 힘든 세상이니깐 은근히 책이 늘 고프다. 그래서 오늘도 도서관에 온 거 아니겠는가. 우연히 필연처럼 내 손에 들린 책을 책가방에 넣고 도서관 문을 힘차게 열고 나가는 길, 정말 풍족한 양식을 채집하고 돌아가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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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대출한 책 사이에 껴 있는 무언가를 가끔 발견한다. 소설 주인공 관계도를 그린 메모지(특히 러시아 소설과 한국 대하소설에 등장한다), 책 대출 리스트가 적힌 대출확인증 (그가 어떤 책들을 좋아하는지 대충 파악이 되는 증거물), 각종 영수증, 은행 순서표 등을 발견해 보았다.
얼마 전에는 <아무튼, 외국어>를 빌려봤는데, 첫 장을 펴자마자 모 외국어 대학원 수험 표가 껴 있었다. 화이트 슈트를 입고 짧은 단발에 작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는 어린이 테솔 전문가 과정을 지원한 것 같다. 이름 석 자와 얼굴 사진까지 있는 이 수험 표가 그녀의 임시 책갈피였나 보다.
사진을 한참 보며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영어교육을 공부하려는 그녀는 외국어에 관한 책이라 이 책을 빌려보았을 텐데 책이 재미있었을까? 무엇을 기대하고 이 책을 빌렸을까? 시험이나 면접 날, 가방 속에 이 책이 있었겠지. 학교에 합격했을까? 도서관에 자주 오나? 한참을 들여 보다 다시 책을 읽어나갔다. 합격했기를 바라며, 따뜻한 손길로 수험 표를 그대로 책에 껴놓은 채 반납했다. 두 달쯤 지나 책을 다시 찾아보니 수험 표가 그대로 껴 있었다. 마치 이 책의 일부처럼 책과 어울리는 책갈피였다. 마치 책과 함께 딸려오는 굿즈 같다.
언젠가 M 도서관에 갔다가 자원 활동가 학생들이 지우개로 책 속 밑줄 친 부분을 열심히 지우고 있는 걸 봤다. 나와 친한 사서는 이렇게 밑줄 친 책을 볼 때마다 얼마나 책이 재밌고 집중했으면 자기 책인 줄 착각하고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하신단다. 전직 사서였던 강민선 작가도 <도서관의 말들>에서 비슷한 일화를 썼다. 제일 먼저 책을 읽고 반납했는데 책 곳곳에 밑줄과 메모가 적혀 있어서 전화를 하니, 순간 자신 책인 줄 알고 그랬단다. 연필로만 썼다면 지우개로 지우면 될 테지만 펜으로 쓴 부분도 많아 결국 희망도서로 신청한 새 책을 사내야 했단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책을 읽는 동안 한순간도 도서관 책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난 사실 그분이 밑줄 친 그 책을 대출하고 싶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의 흔적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심지어 불쾌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난 어쩐지 그런 흔적이 즐겁다. 이 책을 같이 공유했다는 연결된 느낌이 든다. 누군가 밑줄 치고 메모한 흔적을 우연히 발견할 때마다 신이 난다. 나라면 밑줄 치지 않았을 것 같은 곳이라 의아해하며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날카로운 비판 지점을 메모한 글에 감탄도 하고, ’적확한’단어에 적이 오타인 줄 알고 정이라 고쳐 써놓은 걸 보고 잠시 졸렸던 순간, 호호 웃기도 했다. 덕분에 잠도 깨고 다시 책을 읽어 나갔다.
반복된 우연의 점들이 필연의 선을 그린다. 우연히 읽게 된 책들을 읽어나가다 지금의 나를 필연처럼 마주한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미래의 내가 말한다. 현재 우연들은 미래의 나를 반드시 만나기 위해 과거의 네가 애쓰다 만난 것이니, 의미 없는 우연은 없다고.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가듯이, 우연히 좋은 글귀를 만나기 위해 매일 페이지를 열듯이,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더 사람 속에 있다. 결국 필연이란 우연의 확률을 높이려고 시도한 축적된 시간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우연한 만남 뒤에 어느새 필연처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우연히 읽게 된 수많은 책과 글의 만남 뒤에 어느새 필연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남아 있다. 이런 긍정의 우연을 사랑하며 책과 우연의 조우를 만드는 ‘우연의 공간’에 계속 머물 것이다.
저항의 공간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반항하는 인간> , 알베르 카뮈, 민음사, 46,47쪽
반항하는 인간은 가장 생동하게 살아있다.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들로부터 회의하고 반항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을 지켜왔다. 저항하는 공간은 그 공간의 필요와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가치있게 여기며 지켜나가는 곳이다. 반항하는 인간이 있음으로 인류의 삶에 균형과 발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저항하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반격하는 디지털 시대가 뭉개고 있는 것들을 살피고 지켜나가려는 인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구시대적 발상과 뒤처진 조치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휩쓸려가는 빠른 물살에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구명보트를 보내는 역할이 존재해야 한다.
도서관은 순위가 중요한 세상에 저항하는 곳이다. 여기저기 광고된 책, 요즘 꼭 봐야 하는 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든, 대출이 전혀 되지 않는 책이든, 막 출간되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간 책이든 동일한 책장에 꽂혀있다. 일련의 청구기호에 따라 최근 베스트셀러 책이 쭈그려 앉아야만 꺼낼 수 있는 가장 아래 칸에 꽂혀 있을 땐, 역시 모든 책을 공평하게 대하는 도서관답다 느껴진다. 특히 잘 안 팔린 내 책이 눈높이에 딱 알맞은 칸에 꽂혀 있는 걸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인터넷 서점 내 순위로 나열된 책들과 편리한 추천 목록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 독서가에서 벗어나 주체적 독서가로서 도서관의 책들을 살펴본다. 어느새 나는 도서관이 품고 있는 저항의 에너지를 받는다. 대형 출판사 책, 유명 작가들의 책, 광고 배너로 봤던 책들 옆, 낯선 책들도 손쉽게 꺼내 훑어본다. 오히려 한 번도 보이지 않아 새롭게 보이는 그 책의 만듦새, 저자와 출판사를 보다 부제목에 끌려 대출한다. 이 책이 어느 한사람 눈에 띄어 도서관까지 온 과정을 생각해 본다. 모든 책들은 둘 이상 누군가에게 반드시 와닿게 하는 마법이 깃들어 있구나 싶다. 나 같은 무명 저자의 책도 어떤 한 사람의 선택으로 도서관이 구입해 주고 비치해 주고, 추천도서로 올려주기도 한다.
온갖 것을 숫자로 판단하는 세상으로부터 도서관은 저항하려고 애쓴다. 몇몇 작은 서점만 해도 많이 팔린 책 순위를 올린다. 그걸 본 사람들이 순위대로 책 구매를 한다. 한번 매겨진 순위는 잘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유명해서 유명해진 유명한 책을 선택한다. 잘 팔리지 않는 책들은 대형 서점에서 몇 달 만에 퇴출 당하지만 도서관은 단 한 번도 대출 되지 않은 책도 몇 년 동안 품고 있다. 단 한 명의 독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 심지어 몇 년 동안 한 번도 대출 되지 않아 폐기처분 위기에 처해 있는 책들만 대출해서 좋은 책을 살리려 했다는 ‘게릴라 사서’들도 있었다. (2016년 미국 플로리다주 소렌토의 이스트 레이크 카운티 공공도서관에서 일어났던 일로 관장 조지 도어가 ‘척 편리’라는 이름의 도서관 카드로 9개월 동안 1년 이상 대출되지 않은 책 2361권을 대출한 사건으로 대출률을 높여 도서 구매 예산을 받아내려 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도서관은 살아있다>, 도서관여행자, 마티,2022,46쪽 )
한 번도 대출 되지 않은 좋은 책을 발견해서 함께 읽는 ‘게릴라 독서가’들도 생겨나면 좋겠다. 책조차 순위를 매김 당하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쉽게 잊히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도서관의 조용한 저항력을 응원하고 싶다. 오늘 나도 반항하는 독서가가 되어 도서관의 저항에 동참한다. 어려울 게 없다. 오늘도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
도서관은 누구인지 확인하는 세상으로부터 저항하는 곳이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아파트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듯 그들만의 공간에 함부로 입장했다가는 침범자가 된다. 어디에 사는지 확인 당하는 시대다. 다른 아파트 놀이터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 사회에 기가 막히지 않으려 도서관에 간다. 적어도 도서관은 어디 사냐고 묻는 이가 없고 누구든 환영하는 곳이지 않은가.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고,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그에 따른 노력에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날. 가만히 멈춰 마음을 들여다 보기 위해 누군가는 명상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피아노를 치는데, 나는 도서관에 간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지만 거기 누군가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그저 거기 같이 있음으로 조용한 위안을 받는다.
책 한 권이 한 그루 나무로 만들어졌다면, 마치 책을 붙들고 있는 저들이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책 읽는 사람의 얼굴은 어쩐지 평안해 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와 애씀 없는 얼굴. 이완된 그들의 얼굴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 어느새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모 지역 도서관에서 아이들 영어 그림책 수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학부모들이 전화로 반 별 레벨을 나눠 달라고 민원이 들어왔단다. 도서관에서 레벨테스트까지 봐야 하는 걸까? 너와 나의 수준을 온갖 것으로 나누려 든다. 나와 같은 수준인지 자꾸만 확인해 보자 한다. 약간의 차이와 격차도 참아줄 수 없다 한다. 달라서 좋을 수 있는 것들보다 같아서 좋은 것들만 보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마주쳐져야만 한다. 다른 서로가 마주할 수 있는 안전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신원을 묻지 않는 절대적 환대에 가까운 공간이 절실하다. 다르지만 함께 머물 수 있음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공의 장소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 장소를 유지하고 더 많아지길 원한다면 그곳으로 우리가 더 자주 가야 한다. 장소는 사람이 만들어가기에 사람이 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작은 도서관 하나가 내년에 폐관한다. 인구가 줄고, 독서인구도 줄고, 점차 도서관도 줄 것이다.
비비언 고닉은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공연자이며 관객이다. 서로의 위치를 바꿔가며 위로받고 배우며 물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상세계의 시간을 줄여 거리로 나와, 어디론가 걸어가, 나와 다른 사람들과 스치고, 얼굴을 흘깃 보고, 미소 짓고, 같은 공간에 머물러 보면서 서로의 연결성을 느껴야 한다.
도보로 40분 거리 H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 텅 빈 가방을 메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거리를 걷다 여러 사람들- 무엇이 긴급하기에 저리도 힘차게 뛰어가는지 모를 청년의 활기찬 얼굴에서 그 일이 설레는 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을 지나친다. 도서관에 도착했다. 2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 열람실에 들어섰다. 수많은 책과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이 새삼 달라 보인다. 저들이 이 공간을 지켜나가고 있다. 오늘 나도 한 명의 반항하는 독서가로서 저항하는 도서관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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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얼마 전 정부가 도서관과 독서문화 사업 예산을 삭감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은 “우리가 키워 온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냐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공공도서관을 지원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행하는 이 현실이 몹시 씁쓸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힘을 잃어가는 마을 공동체에 도서관의 역할마저 약화될까 우려스럽네요. 공공기관으로 도서관을 지을지 체육센터를 지을지 투표하면 체육센터로 결정이 나고, 인구 많은 서울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 폐관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늘 예산이 부족하다며 사서들은 작가와 강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매년 수천 권의 훌륭한 책들이 대출이 한 번도 되지 않아 폐기처분됩니다.
하루 이용자 수를 체크하고 강의 등록자 출석률을 고민하는 도서관 담당자들은 한 명이라도 더 도서관에 와주길 짝사랑하는 이처럼 기다립니다. 도서관은 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제가 얼마나 도서관을 사랑하는지 더욱 깨닫게 되었어요.
알베르토 망구엘이 <밤의 도서관> 마지막 문장에 “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면서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 아마도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위안일 것이다.”라고 썼는데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았어요. 일요일의 도서관까지 다 쓰진 못했지만 이번 심야메일 연재하면서 알게 됐어요. 자신의 글을 읽고 도서관에 가줄 이들을 상상하며 썼기에 망구엘이 마지막에 위안을 구한 게 아닐까 하고요. 그리고 도서관이 인류와 함께 영원할 것이라는 위안을요.
저도 연재를 마치며 그 위안을 구해봅니다. 미흡한 저의 도서관 예찬을 읽어봐주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번 한 주 도서관에 한 번 들러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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