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스,스,스자로 끝나는 말은?”
이제 막 한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민아가 어느새 한글을 가지고 논다. ‘스’로 끝나는 말이라. 다현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와중에 다른 단어는 생각나지 않고 한 단어만 머리에 콕 박혀 귀가 빨개졌다.
“엄마, 생각했어? 뭔데? 빨리 말해줘!”
“‘스’로 끝나는 말이 생각보다 별로 없네~ 민아는? 생각나는 거 있어?”
민아가 “끄리쑤마스!”라고 말하고는 뿌듯한 표정을 짓는 동안 다현은 여전히 붉은 여운이 가시지 않아 손부채질을 했다. 섹스라니. 아무리 어젯밤 일이 있어도 그렇지, 애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다현은 어젯밤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한 짓을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동안 안정감이라고 믿어왔던 감정이 실은 꾹꾹 눌린 욕망이었을까. 스스로를 욕구불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밤은 왔는데, 잠은 안 오지 않았다. 소주 한 잔이면 알딸딸, 한 병이면 치사량인 다현이 막잔을 따를 때였다. 삐삐, 또로록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12시 20분을 막 지나는 시각, 남편이 신발을 벗기도 전에 다현은 현관으로 달려 나가 남편의 허리띠를 무작정 끌어당겼다. 이리 와. 어서! 어리둥절한 남편이 왜 이러냐고 말렸던 것 같다. 가만히 있어! 넌 오늘 나한테 죽었어! 다현은 황급히 침대에 눕히고 허겁지겁 바지를 벗겼다. 그러고는 필름 뚝.
다음 날 아침, 양말만 신은 채 잠이 깬 남편과 벗다 만 브래지어를 허리에 걸친 다현이 눈을 마주쳤다. 한 명이 먼저 상대의 볼을 꼬집으며 ‘으이그’ 한 마디면 넘어갈 만한데, 둘은 마치 원나잇스탠드 후의 타인들처럼 허둥지둥 옷을 챙겨입었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한마디 없고, 출근 인사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분위기인가. 그 이유를 다현은 잘 안다. 다현과 남편은 3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섹스리스이기 때문이다.
다현은 민아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은 오직 아이의 월령기 체크리스트나 예방접종 어플이 알려줄 뿐, 벚꽃의 감성도 낙엽의 낭만도 다현에겐 딴 세상일이었다.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회라는 딴 세상에서 피 터지는 전투 중이라 다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마치 업무분장이 나노 수준인 부품조립 공장의 일원처럼, 다현 부부는 각자의 업무를 쳐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종일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날이 많았다. 하물며 섹스가 웬 말인가. 섹스는 이미 지난 시대의 기념비처럼 부부 사이 어딘가에 버려져 있었다.
언젠가 TV 교양 예능 프로에 출연한 부부 상담 전문가는 이렇게 물었다.
“한 달에 몇 번 하세요?”
그녀는 섹스리스라는 수식어구를 한 달에 한 번, 1년에 10번 미만 관계를 하는 부부에게 붙일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다현의 부부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억울한 마음도 올라왔다. 부부관계가 섹스를 간단히 수치화해 평가할 수 있는 일인가? 부부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면 괜찮은 거 아닌가? 지난 3년 동안 다현은 그랬다. 불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부의 문제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을 하는 부부 상담 전문가 덕분에 다현은 불편하고 불안하기 시작했다.
***
전화벨이 울렸다. 화영이었다.
“내일 점심 먹자. 늘희랑 가인이도 된대. 애기들 몇 시에 하원이지? 3시?”
대학 동아리 동기로 만나 이제는 인생 동지가 된 친구들 진화영, 오늘희, 우가인. 모두 비슷한 시기에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 시기도 비슷했다. 서로의 애정사, 가정사를 가감 없이 털어놓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출동하는 우애 넘치는 사이였다. 하지만 요즘, 다현은 친구들이 불편했다.
다현과 친구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섹종이 시스터즈’라 명명했다. 순수하고 단아한 색종이가 바로 떠오르겠으나, 섹종이는 ‘섹스를 종류 상관없이 이골이 날 때까지!’의 준말이었다. 넷은 말 그대로 모든 섹스를 거부감없이 즐겼다. 모이면 언제나 자신들의 섹스 담을 털어놓느라 날 새는 줄 몰랐고, 친구의 색다른 시도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뜸해지며 다현은 친구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분명히 다현의 섹스 안부를 물어볼 터였다. 지어서 얘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데에 한계를 느꼈다. 다현을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여전히 부부관계 맑음인 것만 같았다. 모두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열 번 이상’이라는 기준에 충분히 부합하는 것 같은데 과거의 섹스 담을 재탕, 삼탕하는 다현은 이제 이 모임이 불편하기만 했다.
다음 날 11시. 늘 모이는 브런치 식당에 도착하니 늘희와 가인이 먼저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니? 어제 화영이 목소리 흥분 쩔든데?”
“그러게 말이야. 빨리 얘기해주고 싶어 안달 났드만. 그 정도면 핵폭탄급이야.”
“혹시 애인 생긴 거 아냐? 걔가 항상 얘기하던 스타일 있잖아. 얼굴은 말랑모찌인데 몸은 육즙이 뚝뚝 흐르는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
화영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친구였다. 섹종이 멤버 중에서도 가장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이라 모범적인(?) 선례가 넘쳐났다. 옆자리 눈치를 보며 큭큭, 숨죽여 웃는 사이 화영이 도착했다.
“어머, 화영! 너 왜 예뻐? 너무 예쁜데?”
가인의 말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화영이 평소보다 더 화사해 보였다. 피붓결은 윤기가 넘쳤고, 가느다란 목선이 더 곧게 뻗어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아니, 그런 사소한 변화가 아니었다. 화영을 둘러싼 기운이 전체적으로 변해있었다.
“오늘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너희도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야. 무조건!”
“뭔데? 너, 뭐, 다단계 시작했어?”
“아니야. 근데 이거 내가 다단계 해서라도 널리 알려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다!”
모두 눈이 동그래져 숨죽인 상태로 기다렸다. 속사포를 쏟아낼 것 같던 화영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보다 먼저 이실직고할 게 있어…….
미안하다, 얘들아.”
화영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고민이 있었어. 그런데 너희에게 말 못 하겠더라. 우리 네 명 중에서 ‘섹탑’인 내가 이제는 제일 쭈글이가 된 것 같아서 말이야. 창피하고, 또 민망하더라고.
...오빠가 날 건드리지 않아. 그런지 한참 됐어. 2년 넘었나?
결혼 초기에는 주 2회는 했었거든. 그런데 점점 뜸해지더니 주 1회, 달에 한 번, 분기 한 번... 따져 보니 작년엔 한 번도 안 했더라. 거미줄 수준이 스파이더맨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졌어. 휴.
내가 가만히 있었겠니? 모텔비만 모아도 내가 모텔 한 채 짓겠다 싶어서 결혼한 내가! 별의별 짓 다 해봤지! 남자들의 판타지 리스트를 하나둘 지워가면서 안 사본 성인용품이 없고, 안 입어본 속옷이 없다. (참! 원하면 품목별로 추천해 줄 수 있어. 가터벨트는 해외 공구가 짱..) 그런데 오빠는 꿈쩍도 안 해. 그냥 안 땡기고, 피곤하대. 내가 무작정 덮친 날도 있는데 물고 빨고 깨물어도 안 돼, 잡고 땡기고 때려도 안 서더라고!
대화도 당연히 해 봤어. 오빠가 그러더라. “나 성욕이 안 생겨. 하고 싶지가 않아.” 그때 든 생각이, 뭔지 아니? ‘이제 나를 여자로 보지도 않는구나, 이 사람이 바람을 피울 수도 있겠구나’, 이런 거? 아니, 전혀. 난 내 걱정이 앞서던데? 내가 이상한 건가? 아무튼. ‘앞으로 난 어쩌라고. 난 아직 젊고, 내 음핵은 이렇게 뜨거운데. 오늘 당장 열 번도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날 어쩌라고!’
서운함, 원망 같은 감정이 순식간에 오빠를 향한 분노로 변하더라. 책임져라! 소리쳤지. 주춤할 만한데, 그 정도로 내가 몰아붙였는데 다행히 오빠는 도망가려고 하진 않더라.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거야.
자, 이제부터 집중해서 들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아.
그날부터 우리 부부는 오감에 육감, 사돈에 팔촌, 지인의 지인까지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했지. 대부분은 부부 상담이나 부부 성 상담을 권하더라. 당연히 다 해봤지. 성감대를 찾아보세요, 전희를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누가 그걸 몰라? 몰라서 못 하냐고!
몇몇은 아는 의사 양반을 추천해 주기도 했어. ‘잠지형’이라고 방송에도 몇 번 나온 비뇨기과 전문의라는데, 비아그라 처방해 주고 끝. 근데 알잖아. 비아그라 먹고 하면 오빠가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오빠 페니스가 섹스하는 거.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리법칙이 주도하는 반복운동일 뿐이잖아. 그게 잠꼬대로 하는 저작 운동이랑 뭐가 달라. 암튼. 별로 유쾌하지 않은 섹스를 몇 차례 하고 나서 우린 더더욱 가열차게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어.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신문 한쪽 배너에 ‘리스피해자를 모십니다’라는 광고를 본 거야. 처음엔 리스피해자라고 해서 중소 규모의 렌탈업체에서 차 빌렸다가 돈 떼 먹힌 사람들 모임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림이 좀 색다르더라고. 빨간 파프리카의 윗꼭지 부분에 바나나가 콕 박힌 사진인데, 뭔가 아랫배가 움찔하는 느낌적인 느낌! 니들도 뭔지 알지?
배너를 클릭하니까 한 사이트로 연결됐어. 근데 광고는 그렇게 도발적으로 해놓고 홈페이지는 뭐랄까,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긴달까? 이름도 ‘리스연구소’인 데다가 정갈한 로고까지 갖췄더라고. 신뢰가 필요했는데, 호기심이 그걸 가뿐히 제끼더라.
바로 연락해 날 잡고, 남편 끌고 가서 상담이랑 검사받고, 한 2주 지나니까 처방 나오더라. 사실 첨엔 장난하냐 그랬어. 처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수석연구원이라는 사람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부부 상담가들이 하는 말이 있죠. 섹스할 때 감정을 나누고 공유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걸 전희라는 일부 행위로 국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섹스의 전 과정, 혹은 부부생활의 일상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적 교류로 확장하는 전문가도 있긴 합니다. 어쨌든 부부관계에서 감정의 교류를 필수적으로 여기는 데는 이견이 없죠. 그렇다면, 성욕은요? 만약 부부관계에 필수적인 ‘감정’처럼 부부관계에 절대적인 ‘성욕’도 나누고 교류할 수 있다면?”
그래, 너희의 반응도 이해가 돼. 나도 그랬어.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여 지껄이길! 나보고 남편에게 성욕을 좀 나눠주라는 거야. 욕구가 뭐, 간이야, 신장이야? 배 갈라서 떼어다가 남편한테 붙이게? 나도 모르게 손이 훅 올라가는 걸 오빠가 말리느라 고생 좀 했지. 너희도 내 성질 알잖아. 그때 연구원이 꺼낸 게 뭔 줄 아니?
화영인 갑자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입술 가운데 붉은 구슬이 박혀있었다.
“피어싱 한 거야?”
“그렇게 보이지? 이건 커넥터야.”
“커넥터?”
“음... 말하자면 빨대라고 할까?”
화영인 구슬이 자신의 성욕을 빨아들여 남편에게 전해준다고 말했다.
“근데 왜 하필 혀야. 윽. 너무 아플 것 같아.”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거야말로 정말 과학적이더라고!”
다시 이야길 시작한 화영인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있다는 연구소에 완전히 빠져든 것 같았다.
자, 잘 생각해 봐. 우리 몸 중에서 섹스파트너의 몸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는 부위가 어딘지. 손? 노노. 사람들은 섹스할 때 의외로 손을 잘 안 써. 생각해 보면 손은 오만 가지를 다 만지는 부위라, 감각이 무디거든. 혀는 어떨까? 내 혀는 오빠의 귀부터 목, 어깨, 젖꼭지, 겨드랑이, 허리, 엉덩이...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방문하거든. 오빠의 혀는 어떨까? 클리토리스와 음순들, 질 안쪽까지 섬세하게 왔다 갔다 하지. 흐음. 안 하면 나한테 죽으니까.
아무튼. 이 커넥터를 장착하면 온몸에 퍼져있는 성욕이 이곳으로 모이고, 파트너의 몸 곳곳에 닿아 성욕을 뿌려준대. 이름하야, 퍼.포.먼스 기술. 하이퍼섹슈얼1)과 하이포섹슈얼2)이 만나 예술이 되는 기술이라!
우리가 한번 해보자고 결정하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어. 장난감처럼 보이는 이 조악한 기술을 믿게 되어서가 아니라, 요 차가운 구슬이 몸 곳곳을 달릴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리잖아. 큭큭.
이건 과학이 아니라 사기 아닐까? 다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늘희와 가인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화영이 영업직군에 걸맞은 입담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섹탑으로서의 경험치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결말은? 해피엔딩이야?”
“당연. 네버엔딩이지!”
늘희와 가인은 그날로 리스연구소의 홈페이지에 상담 신청을 냈다.
***
“나까지 가야 해? 난 아직 더 고민을...”
“너희 부부 문제없는 거 알아. 아는데! 같이 좀 가주라.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니까!”
늘희와 가인은 번갈아 가며 다현에게 전화를 돌렸다. 자기들은 요즘 눈 돌아간 상태라 혹해서 충동 결제할 수 있으니 가장 차분하고 신중한 다현이 태클의 역할을 해달라는 거였다. 다현은 열댓 번의 통화 끝에 다음 날 상담을 함께 가기로 했다.
마지못해 가겠다고 말하는 척했지만, 실은 다현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다현은 모두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리스아웃’ 할 때 다현은 그저 말없이 있었을 뿐인데.
연구소는 화영의 말대로 꽤 근사했다. 노출 콘크리트가 단단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옆에서 봤을 때는 가운데 원형 건물이 있고 양쪽으로 직선처럼 뻗어 나간 형태인데, 연구소 안내 지도로 부감을 보니 여자와 남자를 의미하는 기호 모양이었다. 화살표 아래 남자의 동그라미와 십자 모양 아래 여자의 동그라미가 하나가 된 형태인데,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연구소의 비전을 표출하는 걸 보면 아주 사기 집단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담은 화영을 전담했던 수석연구원이 맡아주기로 했다. 로비에서 방문 수속을 마친 후 게이트 쪽으로 이동하자, 게이트 안쪽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진작부터 셋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환영의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화영 회원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운 오른쪽 가슴팍에는 ‘김오치 수석연구원’이라는 명찰이 눈에 띄었다. 김오치 연구원은 30대 초중반으로 보였으나 어쩌면 40대 중반일지도 모르겠다고 다현은 생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까만 머리는 윤기로 빛났고, H라인 스커트 아래 곧게 뻗은 다리는 요가나 필라테스로 잘 다듬어진 듯 탄탄한 근육이 예뻤다.
연구원의 안내를 따라 공항보다 더 철저한 보안 시설을 통과한 후 다음 장소로 가기까지 김오치 연구원은 연구소의 기술과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 연구소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가고 있습니다. 성기능 개선에 중점을 두는 의료 산업, 심리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상담 분야와는 차원이 다르죠. 상담과 성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달라질 여지가 보이지 않던 분들, 경구용 약물과 주사약, 보형물 삽입까지 해봤는데도 괴롭기만 할 뿐 즐거움이 없었던 분들이 이곳을 거치고 난 후 ‘종이 울렸다’, ‘천국을 보았다’는 간증을 쏟아내십니다. 설립 이래 3년 동안 연구소를 거쳐 간 582명의 회원님 모두가 섹스리스(sexless)에서 섹스풀(sexful)로 나아가셨어요.”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면에는 리스연구소의 이력과 업적을 소개하는 액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창립자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도 있었는데 그는 머리가 정수리 뒤쪽까지 반들반들했고, 고풍스러운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양손의 오른손 중지를 단정하게 펼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성의 반응 주기 5단계’ 패널도 있었는데 ‘욕구기-흥분기-고조기-오르가즘기-해소기’라는 글자 옆 픽토그램에 더 눈길이 갔다. 조개가 입을 벌려 점점 벌어지다가 조갯살이 최고로 통통하게 오른 오르가즘기에서 조갯살 사이로 육즙이 팡 터지는 것이었다. 다현이 아무도 모르게 침을 삼켰을 때 늘희에게서도 꿀꺽하는 소리가 들렸다.
궁서체로 정갈하게 쓰인 ‘씹계명’도 만날 수 있었다.
<씹계명>
1.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지만, 섹스파트너는 고쳐 쓸 수 있다.
2. 학구파가 돼라.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할 때 섹스는 지루해진다.
3. 파고 또 파야 하는 것은 코뿐만이 아니다. 상대의 모든 구멍을 탐색하라.
4.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침대는 가장 훌륭한 성인용품이다.
5. 부부만의 필체를 개발하라. 그리고 골반으로 글씨를 써라.
6. 삑사리가 두려운가. 박치여도 괜찮다. 박자 생각 말고 그냥, 박자.
7. 손목 스냅은 운동할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물론 골반 스냅도.
8. 사자처럼 달려들어도 이빨은 숨겨라. 페니스는 연약한 존재다.
9. 애날(려고 하는 거) 말고 애널은 어떤가. 앞뒤만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10. 어떤 부부든 각자 사정이 있는 법. 사정할 때까지 사정하지 말라고 사정사정해도 좋다.
늘희는 조용히 핸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단톡방에 올려라.” 가인이 속삭였다.
“자, 이제 리스연구소만의 기술집약적 리스테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갤러리와 비슷했다. 다만, 붉은색 조명이 조금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입구에는 돌출된 글자로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새겨져 있었다.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을 오르가슴을 위하여>
하얀 벽면과 바닥 곳곳에 핀 조명을 받는 물건들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용 전자기기들 같았다. 김오치 연구원은 그 중 샤워기 헤드처럼 생긴 물건 옆에 섰다.
“이 음양수기는 얼핏 보면 그냥 샤워기 필터 같지만 남성에게는 양기를, 여성에게는 음기를 적셔주는 획기적인 정수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샤워기 헤드를 이것으로 바꿔주기만 하면 씻으면서부터 음양의 기운이 베드룸에 가득 차게 됩니다. 단, 아이들은 단속해 주세요. 특히 사춘기 자녀의 욕실에 부착할 경우, 자녀 방의 크리넥스 사용량이 대폭 증가한다는 점 명심해 주셔야 합니다.”
다음 물건은 공기 흡입구와 배출구가 있는 게 공기청정기와 비슷해 보였다.
“이것은 색기청정기입니다. 바로 어색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남녀의 냉랭한 기운을 포집해 빨아들이고 독자 개발한 색정 성분이 포말의 형태로 공기 중에 분사됩니다. 이 색정 성분은 흔한 아로마나 마약류의 최음제가 아니에요. 도화살과 홍염살을 모두 가진 사주의 남녀 100명에게 성적 분비물을 기증받은 후 (분비물이요? 네 상상하시는 그것 맞습니다), 그 화학성분을 분석, 합성하여 신물질을 개발한 것입니다. 음양수기와 색기청정기는 3년 약정으로 리스도 가능합니다. 현재 결합 할인 프로모션 진행 중인데 한 번 보시겠어요?”
연구원은 은근슬쩍 리스 홍보 리플렛을 건넸다. 다현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하지만 늘희와 가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걸 다현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가인이 말했다.
“화영이 말로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도 있다고 하던데... 사실 쉰 기간이 너무 오래돼서요. 즉효요법이 아니면 안 돼요....”
연구원의 표정은 오묘했다. 기대했던 반응이었던 걸까. 다현이 영업은 잘 모르지만, 급한 사람일수록 애가 닳게 해야 객단가가 높아지는 법이다. 김 연구원은 다양한 성공 사례를 전시해 놓은 갤러리 룸을 지나쳐 프리미엄 상담실로 바로 직행했다.
가는 동안 프리미엄 서비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리스연구소의 최신 서비스이자 최고의 서비스인 프리미엄 시술은 개개인의 문제점을 다각도로 분석한 후 현존하는 모든 과학기술을 활용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처방을 제시한다는 점, 모든 과학기술이란 의학을 포함해 심리과학, 물리학, 화학, 천문과학, 신경과학, 생명과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을 포함한다는 점(을 말하며 김오치 연구원은 헥헥거렸다), 맞춤 처방은 고유명사처럼 사람마다 달라지므로 여러분이 받으실 퍼스널케어 또한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점에 대해.
“화영 회원님이 받으신 퍼.포.먼스 시술은 성욕의 크기 차이로 인한 갈등 요인을 조율하는 기술입니다. 특히나 화영 회원님의 성욕이 국보급으로 높아서 저희가 남편의 성감 부위별로 수치를 조정하는 데 애를 먹긴 했어요.”
하하하. 역시 화영이야. 알만하다는 웃음 뒤에 왠지 모를 쓴웃음이 뒤따랐다. 화영은 남편을 끌고 와 같이 검사받을 수 있었지만, 사실 다현은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때 가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런 질문을 했다.
“저기 근데... 남편이 꼭 같이 와야 하나요?”
“아닙니다. 아내분들의 검사로 충분히 부부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안에 남편이 있으니까요. 남편분 검사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걱정하실 필욘 없어요. 남편의 상태는 체모와 침, 그리고 약간의 분비물로 분석 가능하답니다. 많은 분이 컴퓨터가 있는 방의 휴지통을 뒤져 찾아오시곤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휴우. 셋의 입에서 동시에 큰 숨이 터져 나왔다. 다현도 뜻 모를 기대감이 차올랐다.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오치 연구원은 각자 다른 검사실로 우릴 안내했다. 셋이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연구소의 적막감은 심장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곳에 다현의 일행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마저 일었다. 그건 아마도 그만큼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된다는 뜻일 거라고 다현은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검사실은 어두웠고, 아무도 없었다. 검사를 주관할 연구원이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룸 한가운데 안마의자처럼 생긴 커다란 무빙베드만 놓여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저절로 몸이 베드 위에 놓였다. 맞은 편 벽면이 밝아지며 스크린 위에 글자가 떠 올랐다.
[베드는 당신의 모든 기억을 분석합니다.
눈을 감고 편안히 누워 명상하듯이 기억을 떠올려 주세요.]
다현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하나의 음성이 귓가에 또렷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하기 힘든 중성적인 보이스가 섹시하게 느껴졌다. 다현의 아랫배가 찌릿하며 질 근육이 움찔했다. 보이스는 질문을 시작했다.
“조다현 님, 가장 최근의 관계를 떠올려 보세요.”
다현은 술김에 덮쳤던 그 날의 흑역사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라 눈을 질끈거렸다. 보이스는 그 전의 관계, 또 그 전의 관계까지 거슬러 물었다. 날짜를 되짚어가며 차근차근 머릿속에 남편과의 관계를 그렸다.
아이가 깊은 잠에 들지 못해 불안하다며 밀쳐냈던 날, 배란일에 신호 보냈다가 하염없이 등만 바라보고 잠들었던 날, 기념일이라 큰맘 먹고 시도했다가 중간에 스탑했던 날... 애초에 하려다 못한 날, 하기 싫어 피한 날, 하다가 실패한 날들의 기억이 하나하나 꺼내졌다.
물론 좋았던 기억도 소환되었다. 아이 재우고 장난감 정리하다가 아이가 기어다니는 놀이 매트에 정액과 애액을 흩뿌렸던 날, 아이의 미끄럼틀을 지지대로 삼아 후배위로 하다가 계단이 파손됐던 날... 어쩌면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기 때문에 현재의 무감각과 무관심이 더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다현은 왠지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궁상이다. 몇 년을 같이 산 부부가 서로에게 설레고 가슴이 뛴다면 병이 있는 게 분명할 것이며, 아이가 주는 행복감과 적당히 크고 아늑한 집이 주는 평안함으로도 충분한데 가족끼리 서로 배려하며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면 그만이지 뭐 하러 이런 고민까지 얹는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이스의 질문은 배우자의 장단점을 떠올리는 것에서 연애 때의 에피소드를 지나 인상 깊었던 영화 속 정사 장면까지 이어졌다.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조다현 님, 가장 좋았던 섹스를 떠올려 보세요.”
가장 좋았던 섹스. 지금도 한 번씩 뇌리를 스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 장면이 있다. 노랗게 바랜 자취방의 벽지, 그 벽면에 기대어 선 남자의 허리춤을 강하게 옥죄는 다현의 다리, 그 다리를 감싸 다현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남자의 굵은 팔뚝, 요망하게 움직이는 허리를 따라 더욱 격렬해지는 두 사람의 신음소리, 어느 순간 불 꺼진 형광등이 번쩍 켜진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지며 아래가 타들어 가는 감각, 몸 안의 모든 것이 다 쏟아져도 좋을 것 다고 느낀 순간의 아득함.
그러나 이 장면엔 남편이 없다.
불이 반짝 켜졌다. 다현의 기억은 이미 읽혔고, 검사는 끝이 났다.
다음주 수요일, 2화에서 계속...
1) 과잉성욕자
2) 저성욕자